1991년 5월7일 '의문의 투신'으로 숨진 한진중공업 박창수 노조위원장의 주검이 안치된 영안실에 무장 경찰관들이 콘크리트 벽을 뚫고 난입하자 유가족들이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1년 5월7일 '의문의 투신'으로 숨진 한진중공업 박창수 노조위원장의 주검이 안치된 영안실에 무장 경찰관들이 콘크리트 벽을 뚫고 난입하자 유가족들이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백남기 농민 부검문제를 둘러싼 대립의 장기화는 80년대와 90년대 사회적으로 민감한 죽음마다 벌어졌던 공방과 대립을 떠올리게 한다.

대표적인 예가 이한열이다. 1987년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당시 22살)씨가 시위 도중에 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쓰러졌다. 이씨는 한 달간 사경을 헤매다 다음달 5일 숨졌다. 경찰은 당일 부검영장을 발부받아 부검하려 했다. 그러나 유족과 시민사회, 병원 의사들까지 나서서 격렬히 저항하는 바람에 결국 영장 집행에 실패했다. 이후 유족과 경찰이 협의해, 가족과 학생 대표 입회로 부검이 실시됐고, 최루탄 파편이 뇌로 들어간 것이 확인됐다.

사법당국과 유족이 합의해 부검하지 않고 사인을 밝힌 경우도 있었다. 명지대 경제학과 1학년생인 강경대(당시 19살)씨는 1991년 4월26일 등록금 인하와 학원 자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다 전투경찰 쇠파이프에 맞아 숨졌다. 검찰과 유족, 대책회의가 부검을 두고 갈등을 벌이다 양쪽 관계자가 참가한 공동검안에 합의했다. 양쪽은 공동검안팀에 부검 여부 결정을 일임했다. 이들은 부검이 필요치 않다고 판단했다. 결국 컴퓨터단층촬영(CT)으로 외부 충격을 받아 부러진 갈비뼈가 심낭을 찔려 출혈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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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통 끝에 접점을 찾았던 두 사례와 달리,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려는 국가기관 쪽이 결국 강제로 시신을 탈취한 사례도 종종 있었다. 1991년 박창수(당시 31살)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사망사건이 대표적이다. 박 씨는 대우조선 파업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안기부(현 국정원)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고 고문을 받았다는 논란이 일었다. 서울구치소에서 단식 투쟁을 하던 중 원인 모를 상처를 입어 안양병원에 입원했고, 3일만인 그해 5월6일 병원 마당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사망 당시 젊은 남성들이 병실을 방문한 점 등을 들어 안기부에 의해 살해됐다는 의혹이 있었다. 경찰은 부검 논란이 채 일기도 전에 사망 다음 날 영안실 콘크리트 벽을 뚫고 들어와 박 위원장의 주검을 탈취해갔다. 유족 쪽 입회인 없이 부검이 이뤄졌고, ‘자살’이란 결과가 나왔다. 1986년 3월 서울 금천구 독산동 신흥정밀 노동자 박영진(당시 27살)씨는 정권 쪽이 노동자들의 연대투쟁이 격화되는 것을 우려해 시신을 탈취한 경우다. 파업 투쟁 중 경찰의 진압을 피해 회사 옥상으로 올라간 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고 외치고 분신한 뒤 사망한 그를, 경찰은 백골단(하얀 헬멧을 쓴 사복 무장 경찰)을 앞세워 노동자들을 연행하고 주검을 탈취해 화장했다.

백남기 농민 사망사건과 관련해 1996년 3월29일 숨진 연세대생 노수석(당시 20살)씨 사례도 종종 언급된다. 노씨는 김영삼 대통령 대선자금 공개를 요구하는 시위에 참석했다가 경찰에 쫓기던 중 사망했다. 유족 쪽 변호사와 의사가 참여한 가운데 부검이 이뤄졌지만, 부검단은 구타 등 외부 요인이 아닌 ‘심장질환으로 인한 급성 심장마비’가 사인이라고 결론 내렸다. 노씨의 아버지 노봉구씨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백남기 농민 사태를 보면서, 왜 수석이의 부검을 반대하지 못했을까 너무 후회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