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파기환송심 공판에서 국정원이 2011년부터 사실상 보수단체들의 ‘컨트롤타워’ 노릇을 해온 정황(<한겨레> 26일치 1·3면)이 드러난 가운데, 2013년 5월 공개된 이른바 ‘박원순 제압 문건’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국정원이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와 대한민국어버이연합(어버이연합)을 활용해 박원순 서울시장에 대한 여론전을 펼치려 한 정황이 고스란히 나와 있기 때문이다. 당시 검찰은 “국정원 문건으로 보기 힘들다”며 사건을 덮었지만, 최근 전경련(자금지원)-어버이연합(관제데모 시행)의 ‘검은 커넥션’이 사실로 확인되면서 국정원의 개입 여부에 대한 재수사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2013년 5월 <한겨레>가 입수해 공개했던 ‘서울시장의 좌편향 시정운영 실태 및 대응방향’(박원순 제압 문건)이란 문건에는 “경총·전경련 등 경제단체를 통한 비난 여론 조성”과 “자유청년연합·어버이연합 등 범보수진영 대상 박 시장의 시정을 규탄하는 집회·항의방문 및 성명전 등에 적극 나서도록 독려”, “저명 교수·논객, 언론 사설·칼럼 동원” 등 특정 단체를 거론하며 박 시장을 압박하는 구체적인 실행 방안이 담겨 있었다.
실제로 이 시기, 어버이연합 등 극우·보수 성향의 단체들은 박원순 시장 비방·규탄 등 관제 데모를 실행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최근 <제이티비시>(JTBC) 등의 보도를 통해, 관제 데모가 시행됐던 2012년 2월부터 2014년 말까지 전경련이 어버이연합의 차명계좌에 5억2300만원을 꽂아준 사실이 확인됐다. 전경련이 돈을 입금한 시기와 맞물려 어버이연합은 박 시장의 아들 박주신씨의 병역 의혹을 규탄하는 집회를 개최하는가 하면, 박 시장이 재선에 나선 2014년 6·4 지방선거를 앞두고도 서울시청 앞에서 ‘친환경급식 농약 검출’ 규탄 시위를 1주일 동안 5차례나 벌였다. 당시 민주당의 고발로 수사에 나선 검찰은 문건에 담긴 내용이 실제로 실행됐는지 수사하지 않은 채 “국정원 문건으로 보기 힘들다”며 수사를 종결했다. 당시 민주당은 “국정원 문서가 외부로 나갈 때는 고유의 폰트를 변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 직원의 실명과 전화번호까지 구체적으로 나와 있으므로 해당 직원에 대한 소환조사가 필요하다”고 반발했지만, 사건은 현안에 밀리면서 유야무야됐다.
하지만 최근 전경련과 어버이연합의 관계가 사실로 드러나면서, 국정원 문건이 아니라던 박원순 제압 문건이 정말 국정원 문건이 아닌지 진위를 밝혀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된다. 특히 ‘피해’ 당사자인 박 시장은 26일 자신의 트위터에 “이제 진실을 전해 거짓을 제압해야 합니다”라고 썼다.
한편, 이날 서울서부지법에선 어버이연합의 집회를 지시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허현준 청와대 행정관이 <시사저널>을 상대로 낸 출판금지 및 인터넷판 기사 삭제 가처분 소송과 관련해 심문이 진행됐다. 허 행정관 대리인은 법정에서 “허 행정관이 소속된 국민소통비서관실의 주 업무는 시민사회와 소통하는 일”이라며 “통상적인 업무 수행으로 협의를 한 적은 있으나 문자메시지로 ‘집회를 열어달라’거나 ‘열어라’라고 지시한 사실은 전혀 없다”고 의혹을 부인했다. ‘2030정치공동체 청년하다’ 등 청년단체들은 이날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보수단체를 부추겨 관제시위를 지시한 사실이 검찰 수사에서 확인된다면 이는 청와대 행정관에게 직권남용죄를 적용해 처벌해야 한다”며 허 행정관을 고발했다.
또 서울중앙지검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선교재단 계좌를 통해 어버이연합을 우회 지원한 의혹을 받고 있는 전경련에 대해 금융실명제법 위반 등의 혐의로 수사를 의뢰한 것과 관련해 형사1부(심우정 부장검사)에 사건을 배당하고 수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