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에 대한 강자의 ‘갑질’은 SNS에서 폭발적인 분노를 일으키기도 한다. 사진은 지난해 12월30일 구속영장이 발부돼 서울 서부지검에서 서울구치소로 향하는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약자에 대한 강자의 ‘갑질’은 SNS에서 폭발적인 분노를 일으키기도 한다. 사진은 지난해 12월30일 구속영장이 발부돼 서울 서부지검에서 서울구치소로 향하는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영화를 보면 배가 고파지는 ‘푸드 포르노’로 소문난 <아메리칸 셰프>는 실은 ‘SNS 추락 체험 영화’였습니다. 유명 요리사 칼 캐스퍼는 음식평론가의 혹평을 받고 관련 글들이 나돌자 홧김에 처음 해본 트위터로 욕설을 보냈다가 RT되며 망신살을 삽니다. 결국 오너와도 갈등을 빚고 해고당하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트위터 해고’는 영화 속 얘기만은 아닙니다. 지난 12일 <뉴욕타임스> 매거진에 실린 ‘어떻게 바보 같은 트위트 하나가 저스틴 사코의 삶을 망쳐버렸나’라는 칼럼에서 존 론슨은 최근 트위터에서 횡행하고 있는 ‘망신주기’ 현상에 대해 분석했습니다. (▶기사 번역 글)

IAC(미국에 있는 한 인터넷 회사)의 홍보 담당자였던 저스틴 사코는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여행을 떠나며 겨우 170명의 팔로어에게 장난스러운 트위트들을 날렸습니다. ‘옆 자리에 앉은 체취가 고약한 독일 승객’, ‘추운 영국 히드로 공항에서 먹은 맛없는 샌드위치’ 등에 대해 소소하게 흉을 봤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트위트는 “아프리카로 간다. 에이즈에 안 걸렸으면 좋겠는데. 그냥 농담이야. 난 백인인데!”였습니다. 이 말은 ‘유색 인종만 에이즈에 걸린다’는 식의 인종차별이 아니라 세상의 불행과 공포로부터 자신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백인들의 어떤 경향에 대한 풍자였다고 사코는 말합니다. 심지어 사코의 가족들은 남아공에 살고, 넬슨 만델라의 정당인 ‘아프리카 민족회의’(ANC)를 지지하는 사람들이라는 얘기도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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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맥락이나 배경과 상관없이 이 트위트들은 사코를 잘 알고 지냈던 사람들뿐 아니라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퍼져나갔습니다. 샘 비들이라는 IT 블로거가 조용히 묻히는 듯했던 이 트위트를 발견해 자신의 팔로어 1만5000명에게 리트위트했기 때문입니다. ‘IAC 홍보담당자의 웃기는 연말 농담’이란 제목으로 글도 썼습니다. 누리꾼들의 비난이 거세지면서 사코는 11시간의 비행 뒤 남아공에 도착해 휴대전화를 켠 순간 자신이 직장에서 해고당했다는 사실을 바로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녀를 가장 가슴 아프게 한 것은 가족들의 비난이었습니다.

공개적으로 망신을 산 뒤 해고당한 사람은 사코만이 아닙니다. 무명전쟁용사의 무덤에서 표지판을 가지고 장난쳤던 여성, 보스톤 마라톤 테러 희생자를 연상케 하는 핼러윈 코스튬을 입은 여성 등은 SNS에 사진이 올라가며 신상이 공개됐고 직장에서 해고됐습니다. 친한 친구들과 한 조심성 없는 행동들이 맥락조차 삭제된 채 공개적으로 퍼날라지며 비난을 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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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는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주로 나타나는 이 현상에 ‘공개적으로 망신주기’(Public shaming)라는 이름을 붙이고 주목하고 있습니다. ‘망신주기’는 대개 어떤 이들의 부적절한 행동을 누군가 비판하는 글(트위트)을 올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망신당하고 해고당한 이들을 인터뷰해 칼럼을 쓴 존 론슨도 소셜미디어 이용 초기에는 동물을 학대한 저널리스트를 앞장서서 비판하면서 사람들의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초기만 해도 집단적인 분노가 정당하고 힘 있고 효과적으로 느껴졌다. 계급이 사라지고, 정의가 민주적으로 이뤄진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망신주기 캠페인이 단지 강력한 기관이나 공인이 아닌, 거슬리는 뭔가를 한 보통 사람 누구라도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또한 얼마나 나쁜 죄였는지와는 별개로 처벌을 즐기는 잔혹함에 놀라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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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적으로 망신주기 유행…미국서 주목

지금까지 SNS에서 나타난 괴롭힘 사례(사이버 불링)라면 주로 10대들 사이에 나타나는 따돌림이 온라인에서 이어지는 소위 ‘사이버 왕따’ 현상이 대표적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자행되던 괴롭힘이 인터넷 카페나 페이스북, 혹은 휴대전화 메시지 등으로 옮겨지는 형태입니다.

미국에선 2013년 레베카 세드윅이라는 여중생이 페이스북과 휴대전화로 “널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표백제나 먹고 죽어라”, “정말 못생겼다” 등의 메시지를 선배를 비롯한 15명에게 지속적으로 받다가 자살했습니다. 학교 선배의 남자친구와 데이트했다는 이유였습니다. 미국 10대의 25%가 사이버 왕따에 시달린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미국, 캐나다 등에서는 연이어 학생들이 자살하며 법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코의 사례를 비롯해 최근 영미권에서 주목하는 사이버 불링은 현실 세계에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공개적으로 자행되는 형태라는 점에서 다소 결이 다릅니다. 낯선 사람들끼리 공개적으로 목표물을 비난하고 망신주는 데서 즐거움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2013년엔 런던 지하철 안에서 음식을 먹는 여성들의 사진만 모아둔 ‘지하철에서 먹는 여성들’이라는 페이스북 페이지가 논란이 됐습니다. 여성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게 올렸고, 촬영시간과 노선, 여성이 먹는 음식을 설명하기까지 했습니다. 대표적인 낯선 사람 망신주기 사례입니다.

근대 이후 사라졌던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는 형벌’의 온라인식 부활이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십자가나 칼과 같은 형틀에 죄인을 묶어 두고 죄를 만방에 알리는 식의 형벌이나 공개 태형같은 것이 이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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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근대 사법 체계가 등장하면서 공개적인 망신주기 형벌은 점차 사라졌습니다. “치욕을 주는 것은 보편적으로 죽음보다 더한 형벌”(벤자민 러시, 1787)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졌기 때문입니다. <더 타임스>는 1867년 기사에서 영국 일부 지방에 남아있는 태형 제도를 비난하며 “뉴캐슬에서 절도로 태형을 맞은 18살 소년은 십중팔구 낙오된다. 스스로 존중하는 마음이 파괴되고, 공개적으로 망신당하면서 경멸이 낙인찍히면, 스스로를 잃고 동료들에게 버림받은 느낌을 갖게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일말의 교화 가능성마저 망가뜨린다는 것이지요.

망신을 당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집단에 소속되어 자긍심을 누릴 자격이 없다는 선고나 마찬가지입니다. 동등한 가치를 가진 구성원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것입니다. 사회 전체에 낙인이 찍히면 이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SNS에서 타인을 공격하려는 욕망은 자신이 주목받고자 하는 욕망과 같은 구조 위에 있다. 페이스북 캡처 사진
SNS에서 타인을 공격하려는 욕망은 자신이 주목받고자 하는 욕망과 같은 구조 위에 있다. 페이스북 캡처 사진

왜 망신을 주고 싶어 할까요? 모든 사회적 갈등의 형태는 ‘인정투쟁’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한 독일의 철학자 악셀 호네트는 동등한 사회적 존재로 인정받고 싶은 도덕적 기대가 파괴됐을 때 사람들은 “도덕적인 격앙”을 느낀다고 설명합니다. 또 이런 분노가 때로는 “정치적 저항의 동기를 갖게 하는 가능성”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최근 한국의 트위터나 페이스북은 주차요원을 무릎 꿇린 백화점 모녀 이야기, 승무원에게 폭언을 퍼붓고 비행기를 되돌린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의 이야기로 떠들썩했습니다. 분노한 사람들은 관련자들의 신상을 공개해 퍼나르기도 했고 악담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일이 아닌데도 ‘널리 알려주세요’라는 의미로 SNS에 퍼나르는 것은 분노를 공감한 데서 기인합니다.

이런 분노가 부정적인 감정의 토로에서 그치지 않고 현실 사회에서 조직적인 저항 운동으로 정치화한다면, 백화점 주차요원이나 대한항공 승무원과 같은 피해자도 공동 저항에 참여함으로써 잃어버렸던 자아존중감을 되찾을 수 있게 됩니다. 반대로, 사회적인 저항에 부딪혀 더 이상 같은 행동을 할 수 없게 된 ‘갑’은 수치심을 느끼게 되고, 자신을 전보다 더 낮게 평가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런 ‘망신주기’는 사회의 도덕적인 기대를 어그러뜨렸음에도 불구하고 공적인 시스템을 통해 처벌받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갑’들에게 수치심이라도 안겨 행동에 제재를 가하려는 대중의 정치적 행위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최근의 ‘망신주기’는 온라인 말고는 현실적인 저항의 공간이 없는 약자들이 사회적 강자를 공격하는 형태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전철에서 음식을 먹는 낯선 여성 사진을 올리고, 사소한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나무라고, 편견에 가득한 말을 내뱉었거나 비과학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의 신상을 털어 전시합니다. 사코의 예처럼 오해받기 쉬운 발언들도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따로 퍼날라져 공격 대상이 되었고 사코는 직장에서 해고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사코가 인종 차별 관련 업무를 처리하는 공무원이나 법관 등 편견을 지녀서는 안 될 위치였더라면 모르겠으나, 그는 그저 보통 직장인이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잠자리에서 이불을 발로 차버리고 싶을 정도로 바보같은 일들을 저지릅니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뽐내고 싶어 허풍을 떨기도 하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기도 합니다. 과거 같으면 잠시 주변에 망신당하고 말 일이 이제는 온라인에서 맥락도 사라진 채 복제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사회행동 대부분을 목격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기존의 가정은, 온라인에서의 모든 행동이 자신은 모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목격된다는 가정으로 대체되었다”(<넷스마트>, 하워드 라인골드)는 말이 분명한 사실이 됐습니다.

공격은 또 다른 공격을 불러옵니다. 존 론슨이 조사한 사례 중 하나를 보면, 한 남성이 IT 컨퍼런스에서 친구와 성차별적인 농담을 했다가 해고당했습니다. 뒷줄에 앉아서 그의 말을 듣게 됐던 여성이 불쾌함을 느끼고 그 남성의 뒷모습을 찍어 트위터에 올렸기 때문입니다. 이 둘은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였습니다. 남성이 ‘해고당했다’는 글을 올리자, 이번엔 고발한 여성에게로 역풍이 불어닥쳤습니다. 신원이 공개되고 남성단체 등에서 협박물이 날아드는가 하면, 일하던 사이트는 디도스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 여성도 해고당했습니다. 남성도, 여성도 그저 평범한 회사원일 뿐이었습니다.

■ 주목받고 싶은 마음, 강도는 점점 더 커져

저스틴 사코 사건을 다룬 ‘뉴욕타임스 매거진’ 기사 웹 화면(왼쪽)과 SNS에 쏟아진 사코 비난 트위트들.
저스틴 사코 사건을 다룬 ‘뉴욕타임스 매거진’ 기사 웹 화면(왼쪽)과 SNS에 쏟아진 사코 비난 트위트들.

SNS에서 이뤄지는 망신주기는 상대를 가리지 않을 뿐 아니라 강도가 더욱 커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강준만 교수는 일찍이 2005년 칼럼에서 “다른 사람의 눈길을 끌려고 하는 ‘인정투쟁’은 인터넷이 도입되면서 ‘사이즈’와 ‘주목’ 효과가 커졌다”(▶관련 기사)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 예를 들어, 희생은 누구나 꺼리는 일이지만 누군가 알아준다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내가 무슨 희생을 하건 아무도 봐주지 않는다면 희생하고 싶은 마음도 약해질 것이다. 반면 나의 희생이 영웅적 행위로 널리 알려질 수 있다면 애초 마음먹었던 희생의 정도보다 ‘오버’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꼭 ‘희생’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놀라움의 눈길을 던진다고 할 때 무대 위에 선 것처럼 우쭐해지는 심정은 누구나 이해할 것입니다.

SNS는 인정욕구를 과시할 수 있게끔 최적화된 미디어 플랫폼입니다. 모두가 자신을 서사로 한 주인공이 될 수 있고, 넓은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맛있게 먹은 음식, 높은 산에서 찍은 셀카, 귀여운 아기 자랑… 때로는 눈물이 핑 돌게 하는 이야기와 재기넘치는 한마디로도 수많은 ‘좋아요’와 ‘RT’를 받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주목받는 것이 좋아서 비난받을 만한 말이나 행동을 일부러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SNS에서 편견에 가득한 사람, 인종차별을 하는 사람, 비과학적인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광범위한 사회적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 공감대가 돈벌이에 이용되기도 합니다. 사코를 비판했던 사람 또한 사코의 행위를 짚어내면서 전 세계적인 지지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사코가 부주의한 게시물을 쓴 것도, 자신의 ‘재치’를 드러내고 공감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을 겁니다. “소셜미디어는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을 다루는 데 완벽하다. 사코를 괴롭혔던 사람들의 동기와, 사코가 히드로 공항을 돌아다녔을 때의 동기는 같다. 모르는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것, 본 적 없는 사람을 즐겁게 하고자 하는 동기다.” 존 론슨의 문장이 날카롭습니다.

정유경 기자 ed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