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인터뷰 기사는 2개의 버전이 있습니다. 간략하게 읽으실 분은 3일치 <한겨레>에 실린 기사( ▶ 바로 가기 : “세월호 참사, 10년 전 황우석 사태와 다르지 않다” )를 읽으셔도 되고요. 인터뷰가 나오게 된 앞뒤 사정을 알고 싶은 분은 아래를 읽으시면 좋을 듯합니다. 기사는 액자형으로 짜여 있습니다. 인터뷰를 하게 된 이유는 프롤로그에, 인터뷰 전문은 본문에, 인터뷰 후기는 에필로그에 있습니다. - 편집자 주
# 프롤로그10월4일 토요일 밤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영화를 봤다. 2005년 우리 사회를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던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조작 사태를 다룬 <제보자>였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2개였다. 줄기세포의 진실을 밝히는 방송이 나가지 못할 위기에 놓이자 주인공인 윤민철(박해일) PD가 사장 차를 막아 세우고 난 뒤 “방송은 공정해야 하고, 외압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내용의 ‘방송 강령’을 외우는 거였다. 난 그 장면을 보면서 “실제 주인공인 한학수 PD가 저렇게 차를 막아 세웠나?”라고 생각해 봤다.
또 다른 하나는 박해일의 상사인 이성호 팀장(박원상)이 방송이 어려워지자 “우리 같이 구속되자”라고 말할 때였다. 내가 실제 주인공인 최승호 책임PD를 취재했을 땐 최 PD는 “학수야, 너 구속돼라”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한학수 PD를 인터뷰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옛 추억을 그리며 괜찮은 영화 한 편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페이스북에 낮 익은 글이 올라왔다. 이제훈 <한겨레> 사회정책부장이 공유한 기사였다. 제목은 “최승호 책임피디, ‘한학수 피디! 너 구속돼라’ 였다. 9년 전 내가 쓴 기사였다. 기사를 클릭해 보니, 페북에서 ‘공유’된 건이 2000개가 넘었다. 페북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에 만든 기사였는데, 지금 디지털에 그 기사가 유통되고 있었다. 영화가 무대에서 사라졌던 콘텐츠를 다시 불러왔던 것이다. 그 인터뷰 기사의 후속을 쓰고 싶었다. 이제훈 부장은 지면에서 이와 관련한 칼럼을 썼다. ▶ 바로 가기 : [편집국에서] 세월호와 황우석, 수치심에 대하여
페이스북 채팅창에서 한학수 PD에게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연락이 왔다. 다른 신문사와 인터뷰가 잡혀 있어 곤란하다는 내용이었다. 다시 한 번 연락했다. 황우석 사태의 진실이 밝혀진 뒤 한겨레가 가장 먼저 최승호 책임PD와 한학수 PD를 인터뷰했는데, 그 옛 정을 생각해 인터뷰 해주면 안 되겠냐는 애원이었다.
손석희 앵커가 진행하는 ‘JTBC 뉴스룸’은 제보자의 임순례 감독과 실제 제보자인 류영준 교수(강원대 의학전문대학원)와 인터뷰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다시 한학수 PD가 떠올랐다. 그와 인터뷰를 하고 싶었다. <나·들> 4월호에서 이재명 기자가 쓴 인터뷰 기사( ▶ 바로 가기 : 8년 만의 고백 “내가 황우석 사기 제보한 이유는…” )도 읽어 보았다.
10월30일 수요일 낮이틀 뒤 한 PD한테서 연락이 왔다. “그놈의 옛 정 때문에~인터뷰 하자!”고. 30일 오후 5시 한겨레신문사에서 하기로 약속을 정했다.
# 전격 인터뷰
1. 영화 <제보자>에 대해
- 영화는 어땠나요?
“임순례 감독이 황우석 박사를 악당으로 몰아붙이지 않았는데요. 선악을 구별해 보여주기보다 ‘황우석 사태’를 통해 우리 사회의 문제를 보여주려 한 것 같아 더 좋았습니다. 올해 황우석 사태는 햇수로 10년째를 맞는데요. 학술, 언론, 문화 분야에서 이를 다시 조명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첫 번째 시도가 영화 <제보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 실제와 영화가 닮은 점은 무엇인가요?
“영화에서 보면 시사 교양국 이성호(박원상) 팀장이 윤민철(박해일) PD에게 “피츠버그로 가라. 지금 가서 취재원을 취재하라”고 나오는데요.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배우 박원상이 연기한 최승호 PD는 실제로 취재 중반 때 이렇게 말했어요. ‘이런 취재는 도중에 꺾이게 되면 절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끝까지 밀어붙여서 그 진위가 무엇인지를 밝혀야 한다.’ 독한 부장이었죠. 당시엔 많은 외풍이 있었어요. 부장, 국장, 사장이 그런 외풍을 막아주었습니다. MBC의 그런 시스템이 있었기에 취재가 가능했습니다.”
- <한겨레>에서 최초로 소개됐던 “학수야, 너 구속돼라”는 멘트가 영화에선 “우리 구속되자”라고 나오더군요?
“최 부장은
- 실제와 영화가 다른 점 무엇인가요?
“박해일이 사장 차를 붙잡으며 방송 강령을 또랑또랑 외치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실제론 그렇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난 방송 강령을 그렇게 외우지 못해요(웃음). 우리가 진실 보도를 하고 싶은 의지를 영화에선 그렇게 표현한 것 같아요. 실제론 12월4일 YTN 방송이 나가고 며칠 뒤 최승호 부장과 함께 최문순 당시 MBC 사장을 만나 간곡하게 방송이 나가야 한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최 사장도 우리와 생각이 다르지 않았죠. 다만 시기를 조율해 보자고 말하더군요.
또 다른 점은 영화에선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당시 진실을 밝히려고 노력한 많은 이들이 생략된 게 아쉬웠어요. 저와 함께 취재를 했던 김현기 PD와 윤희영 작가가 나오지 못했죠. ‘어노니머스’ ‘아릉’ 같이 진실을 밝히려는 과학자들 역시 영화에 등장하지 않아 아쉬웠어요. 실제 취재에서 브릭(BRICㆍ생물학연구정보센터)의 젊은 과학자들 도움이 컸어요. 그들이 아니었으면 진실 규명이 힘들었을 겁니다.”
- 영화가 우리 사회에 던져주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이 영화가 우리 사회에 단순한 재미를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의미를 남겨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공지영씨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도가니>가 히트를 치면서 아동과 장애인 성폭력 범죄의 처벌을 높인 ‘도가니법’이 만들어졌는데요. 이 영화를 계기로 우리 사회의 공익 제보자들이 정신적, 물질적인 피해를 입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보호해주는 법과 장치가 마련됐으면 좋겠습니다.”
2. 황우석 사태에 대해
- 제보자인 ‘닥터K’ 류영준 박사와의 첫 만남이 궁금한데요?
“2005년 5월31일 류 박사는 PD수첩의 15주년 특집 방송에서 최승호 PD의 클로징 멘트를 봤습니다. ‘저희 PD수첩은 능력이 모자라서 제대로 비판하지 못한 적은 많았지만, 압력 때문에 피해 간 적은 없었습니다. 시청자만을 두려워하는 방송, 그것은 여전히 저희 PD수첩의 신념입니다’라는 내용이었죠. 그 멘트가 닥터K의 가슴에 꽂혔죠. 다음날 류 박사는 ‘황우석 교수 관련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제보란에 글을 올렸습니다. 6월3일 나는 그를 만나러 원자력 병원에 갔었죠. 그가 나를 처음 보자마자 ‘한 PD님, 진실과 국익 중에서 어느 것이 우선인가요?’라고 말하더군요. 그가 나에게 맨 처음에 물은 그 질문이 황우석 사태를 한 마디로 표현해 주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 진실과 국익 논란은 황우석 사태를 관통하는 화두였는데요?
“사실 진실과 국익은 서로 상충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진실이냐, 거짓이냐’ 또는 ‘국익에 도움이 되느냐, 사익을 추구하느냐’처럼 서로 카테고리가 달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언론인은 진실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선택이 그 조직, 그 사회, 더 나아가 그 국가에 도움이 되는 것이니까요.
진보적인 사람이든 보수적인 사람이든 당시엔 정치 성향에 관계없이 PD수첩 보도를 믿지 않으려고 했죠. 최승호 PD가 말한 것처럼, ‘상식의 저항’과 맞서야 했어요. 진보나 보수를 떠나 진실, 정직, 신뢰는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가치인데 말이죠.”
- 닥터K가 제보를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보자는 황우석 박사 밑에서 줄기세포 팀장을 맡았던 핵심 연구원이었죠. 그런 그가 제보를 한 건, 한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아이는 교통사고로 신체 일부가 마비됐는데, 제보자는 아이의 줄기세포를 만들려고 연구를 했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죠. 제보자가 연구실을 떠나고 2년 뒤 황 교수가 그 아이의 몸에 줄기세포를 넣어 임상실험을 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제보를 결심하게 됐습니다. 동물실험에서 줄기세포의 30%는 암으로 전이되는데요.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제보를 하게 된 것이죠.”
- 제보자는 어떤 사람인가요?
“강직하고 무결점한 사람이었습니다. 상당수 제보자들은 사건이 커지고 압박이 들어왔을 때 진술을 번복하고 숨어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닥터K는 견디기 힘들 정도의 괴로움을 겪었지만 끝내 자신의 말을 번복하지 않았습니다.”
- 황우석 사태 취재에서 가장 힘들 때는 언제였나요?
“첫 번째는 와이티엔(YTN)이 진실검증 보다 황우석 박사를 비호하는데 급급해 ‘PD수첩이 취재윤리를 위반했다’고 청부 보도했을 때였습니다. 곧바로 <동아일보>는 ‘황 교수 죽이러 여기 왔다’, <조선일보>는 ‘PD수첩 협박·함정 취재’, <중앙일보>는 ‘MBC 주장 맞는 것 하나도 없다’와 같은 제목을 1면 머리로 뽑으며 우리를 압박했죠. 하지만 보수언론이 자랑스럽게 내세운 내용은 며칠도 안 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두 번째는 제보자가 원자력병원에서 해고됐을 때였습니다. 11월15일 제가 회사에 출근하러 가는 길에 전화가 왔어요. ‘원자력병원에서 사표를 쓰라고 합니다’라는 내용이었어요. 강요된 사직이었죠. 황우석 박사 쪽이 해고되기 한 달 전부터 ‘류영준이 제보자’라고 언론에 흘렸습니다. 제보자를 익명으로 보호하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끝내 제보자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 살해 위협도 받았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가족 사진이 인터넷에 뿌려졌어요. 저에겐 ‘민족의 반역자’란 딱지를 붙이더군요. 그 정도 표현은 애교로 봐줄 정도였죠. ‘사지를 찍어죽이리라’ ‘죽여야 할 사람은 이 세 사람’ 같은 살해 위협의 말이 인터넷에 나돌았습니다.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기에 아내와 아이를 지방에 피신 보낼 수밖에 없었어요. 아내는 지방에서 YTN 방송을 보며 ‘이제 남편은 끝났구나’라며 철철 울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그 때 당시 너무 놀라 지금도 YTN은 안 보세요. 그런데 승호 형은 달랐어요. ‘나는 잘 못한 것 없다. 돌 던지면 돌을 맞겠다’며 신변보호 요청도 하지 않았죠. 참~ 독한 사람이었습니다(웃음).”
- 지난 9월말 낸 책 <진실, 그것을 믿었다>을 보면, 황우석 사태의 원인을 ‘과학계와 정부, 언론의 삼각 동맹이 똬리를 틀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찾은 것 같습니다. 10여년이 지난 지금은 달라졌을까요?
“언론과 정부와 학계가 카르텔을 맺고 서로 눈감아 주던 것이 곪을 대로 곪아서 터진 것이 황우석 사태였죠. ‘비열한 언론인’ ‘술수에 능한 과학자’ ‘가면을 쓴 정치인’ 같은 보고 싶지 않은 우리의 치부가 남김없이 드러난 거였죠. 지난 4월 세월호 참사도 그런 카르텔이 지속되면서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업의 탐욕’ ‘정부의 무능’ ‘공직자의 부패’ ‘윤리의 타락’이라는 우리의 현실을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3. 한국 언론의 현실에 대해
- 황우석 박사의 논문조작을 PD수첩에서 방송하지 않았다며 어떻게 됐을 것 같습니까?
“류 박사와 가끔 그런 얘기를 했는데요. 그는 줄기세포의 임상실험을 막기 위해 또 다른 결단을 했을 겁니다. 우리나라 언론이 못했다면 미국 <뉴욕타임스>에 제보했을 거예요. 만약 그랬다면 황우석 사태는 더 큰 문제가 됐을 거고, 국제적인 망신으로 번졌을 겁니다.”
- ‘황우석’ ‘광우병’ 등에서 이슈 파이팅 했던 PD수첩이 최근엔 그렇지 못한 것 같은데요?
“2011년 5월 문화방송 경인지사 수원총국의 비제작 부서로 발령이 났죠.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어 강제전보 취소 가처분 소송을 내 승소했어요. 하지만 2012년 파업 뒤 회사는 강제 교육명령으로 100여명의 PD와 기자 등을 ‘신천교육대’로 불리는 문화방송 아카데미에 교육발령을 냈습니다. 그 곳에서 브런치 만들기, 동양미술의 이해, 문학과 인생 같은 대학교 1학년 교양과목 수준의 강좌를 들었습니다. 내가 과연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언론인이 맞는가하는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 현재 우리나라 언론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으신가요?
“우리나라 언론 현실은 녹록치 않아요. 표현의 자유가 대단히 위축되고 있습니다. 황우석 사태를 취재할 때 커다란 역할을 했던 최승호 PD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이런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 에필로그
10월30일 밤. 한겨레신문사 6층 취재방에서 난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그의 말을 받아친 건 A4 용지 6매 분량이었다. 날 것의 원고를 앞에 놓고 기사를 2가지 버전으로 어떻게 써야할지 고민했다. 그동안 종이신문에 인터뷰 기사를 쓸 때 이렇게 했다. 인터뷰이가 말한 가장 중요한 것을 ‘야마’(일본말인데 우리말로 풀면 주제)로 뽑고, 그 뒤 인터뷰 분량을 줄이고, 또 줄이고, 또또 줄여서 인터뷰 기사를 만들었다. 이렇게 쓰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디지털 버전이었다. 오프라인과 차별화된 뭔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같은 콘텐츠라 하더라도 디지털 독자의 눈길을 끌게 만드는 뭔가가 필요했다.
몇 시간 생각하다 떠오른 건, 형식의 변화였다. 이야기 속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끼어들어 간 ‘액자 소설’ 방식이었다. 취재를 하게 된 배경과 취재 뒷얘기를 기사 앞뒤로 보여주고, 인터뷰는 전문으로 해 본문에 넣는 거였다. ‘아싸~ 가오리’라며 탁자를 치는 순간,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한 PD가 건 전화였다. “촬영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신사업개발센터로 발령이 났다. 비제작부서인 것은 확실한데 무엇을 하는 곳인지 정확히 모르겠다. 경인지사와 신천교육대에 이어 세 번째로 가게 되는 비제작부서다. 최근 3~4년은 참 힘들다.”
전화를 끊고 난 뒤, 난 그가 쓴 책 <진실, 그것을 믿었다>에 나오는 두 문장을 떠올렸다. ‘진실! 그것은 여리고 쉽게 망가져서 이 거친 세상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 힘을 누구도 거스를 수 없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