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차 역무원 권순중(46) 대리는 28일 오전 10시51분께 매봉역을 출발해 도곡역으로 향하는 서울지하철 3호선 전동차에 타고 있었다. 매봉역에서 근무하는 권 대리는 도곡서비스센터로 외근을 가는 길이었다.
누군가 “불이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객차 끝 노약자석에서 가슴 높이까지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권 대리는 다른 승객들에게 119에 신고하고 비상벨을 누르라고 한 뒤 객차에 구비돼 있던 소화기를 잡았다. 소화기 하나로는 역부족이었다. “소화기를 달라”고 소리쳤더니, 마스크를 쓴 한 여성 승객이 계속해서 소화기를 권 대리에게 건넸다.
서울 3호선 매봉→도곡역 운행중 법원판결 불만 70대 시너 5통 뿌려 3차례 불붙였으나 현장있던 메트로직원 소화기로 꺼 전동차 도곡역 도착 즉시 ‘2인 승무’ 기관사들 문 열어 4백여명 승객 무사히 대피불이 난 3127호 전동차의 기관사 함기선(58)씨는 네번째 객차에 설치된 비상통화장치에서 전해오는 다급한 승객의 말을 들었다. 지난달 20일로 30년을 근속한 함 기관사는 ‘65만㎞ 무사고’ 경력자였다. 함씨는 곧바로 관제실에 화재 발생 사실을 알렸다. 도곡역 승강장에 네번째 객차까지 진입시킨 뒤 전동차를 세웠다. 앞쪽 객차 승객들은 운전실 쪽으로, 뒤쪽 객차 승객들은 전동차 운행이 통제된 매봉역 쪽 선로로 대피하라고 안내방송을 내보냈다. 함 기관사는 도곡역 역무원들과 함께 소화기와 소화전을 이용해 화재 진압에 나섰다.
서울메트로가 운영하는 지하철 3호선 도곡역에서 법원 판결에 불만을 품고 지하철에 불을 지른 70대 남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2003년에 192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대구지하철 참사를 연상시키는 아찔한 사고였지만 다행히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자칫하면 대형 참사로 이어질 수 있었던 사고는 서울메트로 직원들의 재빠른 대응과 시민 협조로 초기에 ‘진화’됐다.
서울 수서경찰서는 28일 시너를 이용해 전동차에 불을 지른 혐의(방화)로 조아무개(71)씨를 긴급체포했다. 경찰과 소방당국, 서울메트로의 말을 종합하면 조씨는 이날 오전 10시51분께 오금역 방향으로 가는 3호선 3127호 열차 네번째 칸 첫번째 출입문 부근에서 가방 2개에 미리 준비해 간 1ℓ들이 시너 11통 가운데 5개의 마개를 열어 바닥에 뿌린 뒤 불을 붙였다. 이 칸에는 승객 50여명이 타고 있었다.
불이 ‘펑’ 하는 소리를 내며 빠르게 시너에 옮겨붙자 이 소리를 듣고 권 대리가 재빨리 대응해 큰 사고를 막은 것이다. 경찰은 “권 대리의 저지로 범행이 실패하자 조씨가 두 차례나 더 시너에 불을 붙였지만 그때마다 권 대리가 불길을 진압했다”고 말했다. 권 대리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깜짝 놀랐지만 이건 정말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스크를 쓴 여성 승객이 많이 도와줬다”고 했다. 그는 “나중에 들어 보니 방화범이 나를 제지하려고 했다고 하더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두 사람이 승강이를 벌이는 사이 전동차는 도곡역에 도착했고, 기관사 함씨는 급히 전동차 문을 열어 400여명의 승객을 무사히 대피시켰다. 함씨는 “전동차 앞뒤로 기관사와 차장이 2인 승무를 하고 있어 유기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고 했다.
난연성 소재로 만든 좌석도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아냈다. 서울메트로는 192명이 숨진 11년 전 대구지하철 화재사고 이후로 모든 전동차의 좌석을 철제나 난연성 부직포 재질로 교체했다. 서울메트로 관계자는 “2010년 9월에 도입한 3127호 전동차 좌석은 금속 소재에 난연성 부직포 방석을 덧댄 형태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조씨가 지난달 광주고등법원에서 받은 판결에 앙심을 품고 범행을 저질렀다는 진술을 했다”고 밝혔다. 광주광역시에서 25년간 카바레를 운영했다는 조씨는 2000년께부터 건물 정화조가 역류해 영업에 지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건물주를 상대로 10여년간 소송을 내며 싸웠지만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치자 불만을 품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조씨는 수억원대 피해를 봤지만 수천만원만 보상받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경찰에서 “5월 초에 발생한 상왕십리 전동차 추돌 사고에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을 보고 내 억울한 심정을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해 전동차에 불을 질렀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범행을 위해 몰고 온 차량에서도 이런 심경을 드러낸 글이 발견됐다고 경찰은 밝혔다. 조씨는 출동한 구조대원에게 환자라고 밝히고 이송되는 과정에서도 “기자들을 불러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씨는 “자살을 시도하기 위해 불을 질렀다”고 진술했으나, 경찰은 “조씨가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도곡역 방화 사건은 지하철 방화라는 점에서 대구지하철 참사와 닮았고, 법원 판결에 불만을 드러내고자 한 동기를 보면 2008년 숭례문 화재와 비슷하다. 숭례문에 불을 지른 채아무개(76)씨는 “행복하게 살고 있는 집이 강제로 철거됐는데 판사는 일방적으로 회사 편만 들었다”며 판결에 불만을 드러냈었다.
이재욱 정태우 이지은 기자 u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