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창월(84) 할머니 수첩에 적힌 가족
염창월(84) 할머니 수첩에 적힌 가족

▶ 달력 하나 구하는 게 얼마나 어렵다고 할머니들을 웃고 울게 만든 걸까요? 한국을 방문하면 달력을 살 수 있지만, 고령의 할머니들은 움직이기도 어렵습니다. 인터넷 검색요? 집에 컴퓨터도 없습니다. 한국 기업들이 주로 만드는 탁상용 달력은 글씨가 너무 작습니다. 아니 무엇보다 지금까지 누구도 사할린 한인 1세들에게 음력 달력이 절실한지 몰랐을 겁니다.

“하라쇼, 하라쇼.”

지난 17일 러시아 사할린주 우글레고르스크시 한인회 사무실에는 할머니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라쇼’는 ‘좋다’는 뜻의 러시아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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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야, 고맙습니다.”

“천 개나 가져오느라 욕봤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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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달력’을 하나씩 펼쳐든 할머니들의 얼굴은 밝았다. 염창월(84) 할머니의 표정이 그랬다. 음력 달력을 한장씩 넘기던 염 할머니의 시선이 4월에 꽂혔다. 4월 배경사진은 전북 남원 광한루의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멋있네. 꼭 한번 가봤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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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복에는 배추 심고, 중복에는 무 심고

함경남도 함흥 출신의 염 할머니는 사할린으로 온 아버지를 찾으려고 어머니와 함께 우글레고르스크에 왔다. 원래 러시아 땅인 사할린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남사할린(사할린 북위 50도 이남)을 양도받았고, ‘가라후토’(樺太·화태)로 이름을 바꿨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은 석탄과 목재 등 자원이 풍부한 가라후토 개발에 적극 나섰다. 개발엔 조선인이 동원됐다. 강제동원 규모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지만, 1945년 8월15일 해방 직후 남사할린에 있던 한인은 4만3000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염 할머니의 친정 식구들은 모두 1956년 북한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할머니는 남편과 함께 사할린에 남았다. 염창월이라는 할머니의 이름이 일본 식민지시기 ‘요시다 후코’가 되고, 사할린이 소련 영토가 되면서 ‘니나’로 바뀌는 동안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건 할머니의 음력 생일이었다. 음력 생일은 할머니의 뿌리와 정체성의 버팀목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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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일이 음력 동짓달(11월) 1일이에요. 우리 애들은 음력을 모르니까 양력 11월1일이 생일이라고 축하해요. 걔들은 이런 달력도 없죠. 그렇지만 우리는 음력으로 해먹지요. 조선 사람이지 러시아 사람이 아니니까 꼭 음력으로 하고 싶어요.” 염 할머니는 음력 달력이 최고의 설날 선물이라며 웃었다.

염창월 할머니와 달리 김인순(80) 할머니는 생일을 모른다. “어머니가 내 11살 때 오빠 아파서 고향 갔다가 소식이 딱 끊겼지. 옛날 아버지들이 자식들 생일 어떻게 기억하나. 그냥 잘 먹는 날이 생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지.” 고향인 경상북도 청도군에 돌아갔다 돌아오지 못한 어머니는 남편과 딸들을 그리다가 1946년 화병으로 숨졌다. 혼자된 아버지는 ‘곧 한국에 갈 수 있다’는 기대에 재혼하지 않았다.

1945년 8월15일 ‘해방’은 사할린에는 찾아오지 않았다. 일본은 잔류 일본인 귀환에 힘썼지만, 더 이상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을 방치했다. 전후 복구가 절실했던 소련은 사할린에서 조선인이 떠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된 이들은 대부분 남쪽이 고향이었지만, 분단과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진 한국 정부는 이들을 외면했다. 해방 대신 찾아온 건 이산의 아픔이었다. 식민지배, 분단과 냉전은 사할린의 조선인을 두 번 버렸다.

음력 생일이 없어도 김인순 할머니는 음력 달력을 요긴하게 쓴다. “농사지을 때 달력을 봅니다. 초복에는 배추 심고, 중복에는 무도 심고. 예전에는 다 자기 밭이 있었어요.” 비코프 탄광에 강제동원됐던 남편과 1950년 결혼 뒤 부부는 부지런히 언 땅이 녹으면 농사를 지었다. 해방 뒤라 국적도 없고, 말도 안 통해 직업을 찾기도 어렵고 월급도 소련인보다 적었다. 식구도 먹여 살리고 내다 팔아 부수입이라도 얻으려면 농사는 기본이었다. 바다 근처 도시에서는 ‘물때’를 보기 위해서 음력 달력을 찾았다고 한다. 매달 음력 1일과 15일은 조수간만의 차가 가장 컸다. 물이 줄어들 때 나가 조개도 잡고 새우도 잡아먹었다. 생존을 위해서도 음력은 필수였다.

식민지시기 강제동원됐고
냉전으로 고향에 못 돌아온
사할린 한인 동포 1세들이
매년 1월이면 찾는 귀한 물건은
음력이 새겨진 한국 달력

“내 생일이 음력 11월1일이에요
우리 애들은 양력 11월1일을
생일이라고 축하해 주지만
우리는 음력으로 해먹지요
러시아 아닌 조선 사람이니까요”

1600명 정성 모여 만든 특별한 달력 1000부

“달력이 뭐라고, 올 때마다 마음이 답답했죠. 그 많은 걸 어디서 구하나, 또 어떻게 들고 가나 싶어서요.”

사할린 동포 지원 활동을 하는 지구촌동포연대(KIN·킨)의 이은영(36) 활동가는 2006년부터 매년 사할린을 찾았다. 음력설을 앞둔 1월에 찾아갈 때마다 한국 달력을 가져와 달라는 ‘이상한’ 부탁을 받았다. 해마다 12월이면 치킨 배달만 시켜도 종종 끼워주는 그 흔한 달력이 사할린에선 귀한 몸이다. 생일도 제사도, 설도 추석도 음력으로 지내는 사할린 한인 동포 1세들에게 음력 달력은 생활의 필수품이었다.

양력만 쓰는 러시아에서 음력 달력을 구하기는 어려웠다. 러시아 땅에서 김치도, 간장도, 된장도 만들어 먹었던 사할린 한인 1세들이지만 음력 달력만큼은 만들 수 없었다. 1945년 8월15일 해방 이전까지 사할린에 살았거나 사할린에서 태어난 한인 동포 1세 중 생존자는 현재 1000여명. 집집마다 달력이 남아돈다 해도 1000부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지난해에는 재외동포재단이 만든 300부를 가져갔는데 턱없이 부족했죠. 달력은 적은데 가는 곳마다 하나만 더 달라고 해서 난감한 적도 많았어요.” 최상구(41) 킨 활동가가 말했다.

‘달력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은영씨와 상구씨는 지난해 일을 냈다. 사할린 한인 동포 맞춤형 달력을 제작하기로 한 것이다. 1차 목표는 음력 표기였지만 생활공간인 러시아의 절기도 무시할 수 없었다. 러시아 양력과 한국 음력을 하나로 합치기로 했다. 고령의 한인 1세들을 위해 숫자도 큼직하게 쓰자고 했다. 평생 고향을 그리워했던 동포들을 위해 고국의 아름다움이 담긴 사진도 넣자 했다. 가장 큰 난관은 돈이었다. 제작에도 배송에도 돈이 들었다. 필요한 돈은 1000만원이었다. 사진은 임재천 사진작가의 재능기부를 받았다. 남원 광한루, 경남 산청, 안동 하회마을 등 한국의 대표적인 명소를 카메라에 담았다.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네이버 해피빈’ 모금도 시작했다. 11월까지 모인 돈은 예산에 턱없이 부족했다. 기로에 놓였다.

“당시 모금 상황으로는 달력을 만들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1세 동포들과 모금해 준 분들께 약속한 것은 지켜야 한다고 결론 내렸죠.” 최상구씨가 말했다. 다행히 모금의 손길이 계속 이어졌고, 1600명의 정성과 재외동포재단의 지원이 모여 ‘세상에서 하나뿐인 달력’ 1000부가 태어났다. 이 특별한 선물을 배달하러 14일 사할린행 비행기에 오른 두 사람의 마음은 설레고 있었다.

달력만큼 기다리는 ‘사할린 특별법’

20일 은영씨와 상구씨는 유즈노사할린스크시 한인회 노인정을 찾았다. 서울에서 온 손님이 달력을 가지고 온다고 영하 20도를 맴돌던 추위에도 20명이 넘는 할머니들이 모여 있었다. 식민지배와 분단, 냉전이라는 한국의 아픈 현대사를 딛고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이복순(78) 할머니는 달력을 보며 연신 웃었다. 달력을 보고 한 번 웃고, 서울 사람을 보고 두 번 웃었다. “죽을 날만 받아놓고 있었는데 달력이 왔어요. 사할린에 있다고 우리를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달력 보고 너무 좋았지요. 우리를 기억해주는 것 같아서. 한국에서 왔다고 사람들한테 자랑했어요.”

1936년 우글레고르스크에서 태어난 이복순 할머니는 한 번도 한국에서 살지 못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음력 박사였다. “어디 보자. 이번 1월에 ‘손 없는 날’(악귀가 없는 길일)이 9일, 10일, 19일, 20일, 29일, 30일이네. 집 고쳐도 일없고(‘괜찮다’는 뜻의 북한말로 조선학교에서 북한식 교육을 받은 한인 1세들은 북한말에 익숙했다), 이사 갈 때도 일없는 날이지. 내가 만날 이걸 따지니까 자식들도 집들이하기 좋은 날까지 나한테 꼭 물어봐요.” 음력 보는 법은 부모님께 배웠다. ‘무식자’였던 부모님은 한글도 일본어도 쓰고 읽을 줄 몰랐다. 일본어, 한글, 러시아어를 할머니는 집이 아닌 학교에서 배워야 했다. 그러나 학교에서도 가르쳐주지 않은 음력 보는 법을 부모는 가르쳤다. 음력은 할머니와 고향을 이어주는 다리가 됐다.

 지인들의 생일은 모두 음력이었다. 음력 달력이 꼭 필요한 이유다. 김민경 기자
지인들의 생일은 모두 음력이었다. 음력 달력이 꼭 필요한 이유다. 김민경 기자

“러시아 달력은 재미없어요. 근데 우리 달력은 설도 추석도 있고, 어린이날, 어버이날도 있고, 대한, 소한, 경칩, 우수도 다 있어요. 우리 명절 보면 좋지요. 아이고 반가워라.” 이복순 할머니와 함께 달력을 보던 서윤금(80) 할머니가 말했다. 한국 노래를 듣는 게 낙인 서윤금 할머니의 애창곡은 ‘꿈에 본 내 고향’이다. 서 할머니는 이젠 양력 생일만 쓰지만 ‘고향’ 자만 들어가면 다 좋다며 한국 달력을 반겼다. 달력은 그리움이었다.

이복순 할머니가 기다리는 좋은 선물은 달력만이 아니다. “그저 춥고 배고파서 먹고살려고 1978년 소련 국적을 받았어요. 한국 국적 받고 싶은데 왜 안 줘요? 그거 없으니까 보상도 안 해준다고 하고. 아이들하고 헤어지기 싫어서 한국 안 가는 건데, 안 온다고 한 푼도 안 주고….” 서윤금 할머니도 옆에서 거들었다. “일본 사람은 김치 냄새 난다고 무시하고, 소련 사람들은 왜 안 돌아가고 여기서 우리 피 빨아먹냐며 천대하고. 서러워서 운 적도 많았는데 이젠 한국도 우리를 낮춰 보는가 봐요.”

1945년 8월15일 이전에 사할린에 있던 한인 1세라면, 원하기만 하면 한국에 갈 수 있다. 한국·일본 정부가 1997년부터 시행한 영주귀국 사업 덕이었다. 지금까지 4000여명의 한인 1세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1000여명은 그리운 고국 대신 차가운 사할린 땅을 택했다. 자녀 때문이었다. 현재 영주귀국 대상자는 한인 1세와 그 배우자, 장애가 있는 자녀 1명으로 제한된다. 고향과 가족을 선택하라는 잔인한 요구에 이복순, 서윤금 할머니는 후자를 선택했다.

2012년 11월 전해철 민주당 의원은 영주귀국 대상을 배우자까지 포함한 자녀 1명으로 확대하고, 잔류 사할린 동포들을 지원하는 내용을 핵심으로 하는 ‘사할린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발의했다. 17대, 18대 국회에 이은 세 번째 ‘도전’이다. 다음달 임시국회 통과를 목표로 하지만 국회의 반응은 미지근하다. 정부 부처들도 업무 중복, 다른 해외 동포와의 형평성, 러시아와의 관계 악화 등을 내세우며 반대한다.

“법 하나도 통과 못 시킨 우리가 고작 달력 하나 가져왔네요. 겨우 그 달력 하나에 고생했다, 고맙다, 명년(明年·내년의 일본식 한자)에 또 보자고 하시니….” 이은영씨가 눈물을 글썽였다. 사할린 한인 1세를 위한 맞춤 달력을 만드는 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이제야 넉넉히 1000부나 만들어 왔지만 ‘하나만 더 달라’고 졸랐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모두 전해줄 수 없었다. 달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받을 사람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69살 이상인 고령의 사할린 한인 1세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그들이 영원히 기다려줄 수 없는 건 달력만이 아닐 것이다.

사할린/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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