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육의 역사를 기억하리라”는 등의 내용이 담겼던 위령비 뒤쪽 비문 자리. 참전군인 단체와 한국 정부가 비문 내용을 문제 삼고 베트남 정부가 압력을 가하자 연꽃 그림으로 가렸다. 사진가 이재갑
“살육의 역사를 기억하리라”는 등의 내용이 담겼던 위령비 뒤쪽 비문 자리. 참전군인 단체와 한국 정부가 비문 내용을 문제 삼고 베트남 정부가 압력을 가하자 연꽃 그림으로 가렸다. 사진가 이재갑

1930년대엔 만주에서
1950년대엔 지리산에서
1960년대엔 베트남에서…
게릴라 접촉 기회 없앤다며
마을 깡그리 태우는 경우 많아
위안부 할머니 성금으로 세운
평화박물관이 장학사업 앞장
베트남평화의료연대는 진료활동
페이스북에서 자발적으로 모인
시민모임도 적극적 후원활동

“우리는 적에게 용감하고 무서운 한국군이 되자, 우리는 월남인에게 예의 바르고 친절한 따이한이 되자…”(주월한국군 참전 3훈5계 중)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한국군은 낯선 행성에 착륙한 우주비행사 같았다. 정글에선 희미한 길을 찾다 방향을 잃고, 마을에선 비밀 보급품 저장소를 찾기 위해 쌀항아리와 솥단지를 더듬어야 했다. 땅속에 미로처럼 파놓은 땅굴을 발견한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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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한국군이 첫 전투부대를 파견했을 때부터 이미 남베트남에 거점을 둔 게릴라단체인 ‘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은 주민들을 정치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미군처럼 한국군 또한 적군과 민간인을 구분하기란 힘들었다. 경계는 때론 모호했고 주민들은 표변했다.

민간인 학살이 집중된 시기 중 하나는 1968년 1~2월 이른바 ‘구정 대공세’ 직후다. 지난 6월16일 세상을 떠난 팜티호아 할머니가 한국군의 공격으로 두 다리가 잘린 시점도 이때다. 1월31일 북베트남(월맹)과 베트남민족해방전선 쪽은 ‘휴전 기간’인 구정 때 14개 성의 주요 도시에서 대공세를 벌였다. 미군과 한국군은 곧바로 반격했지만 많은 희생자가 나면서 미국에서는 반전 여론이 커지고 전쟁의 주도권은 북베트남으로 넘어간다. 베트남민족해방전선에 대해서는 게릴라의 활동무대를 없애는 방식으로 전술이 바뀐다. 게릴라와 접촉할 기회를 차단하고자 주민들을 자연취락에서 소개해 재정착촌으로 이동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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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방침은 이미 1966년 주월한국군사령부가 펴낸 전훈집에 드러나 있었다. 부락은 “모든 적 활동의 근거지”이며 “게릴라의 보급, 인적자원 및 정보수집의 근원은 부락이며, 베트콩 하부구조의 기반은 부락과 주민”이라고 규정했다.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마을 주민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 방식은 무참했다.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근현대사를 통과한 우리 국민에게 ‘극우반공주의’가 자리잡았다고 말한다. 한국전쟁 전후 형성된 분단체제와 내외부의 격한 대립 속에서 ‘빨갱이 처단’의 심리적 기제가 싹텄다. 잔혹한 일을 벌이면서도 죄의식은 중화될 수 있었다. 한 교수는 “특히 한국군이 공격당할 경우 보복심리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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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 없는 전쟁’에서 ‘내부의 적’을 처리하는 방식은 이미 한반도와 주변에서 실행된 적이 있다. 1930년대 일본군의 만주 항일무장투쟁 소탕작전 그리고 한국전쟁 직후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이 베트남인 학살이 벌어진 현장과 다르지 않다. 지리산에서는 빨치산과 연계된 산간마을 주민을 소개해 보급로를 차단한 뒤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벌였다.

1970년 미국 <뉴욕 타임스>에 관련 기사가 실린 적도 있지만, 국내에서 우리 군의 민간인 살상을 언급하는 일은 금기였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이듬해인 1999년에야 <한겨레21>의 보도로 수면 위로 떠오른다.

당시 베트남에 머물던 구수정 <한겨레21> 통신원은 베트남 정부의 문서를 토대로 한국군이 베트콩 수색·토벌작전을 벌였던 중부 5개 성(카인호아, 빈딘, 푸옌, 꽝응아이, 꽝남)의 마을들을 돌며 증언을 수집한다. 베트남 정부 추산 희생자만 5000명이었다. 이듬해 전쟁에 참여한 김기태 예비역 중령의 증언이 나온다. 2002년 6월에는 퐁니·퐁넛 마을(1968년 2월12일), 호앙쩌우 마을(68년 10월22일), 프억미 마을(69년 4월15일)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이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NARA) 비밀해제 문서를 통해 드러난다.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세계적인 이슈로 떠오른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1년 한국을 방문한 쩐득르엉 베트남 주석에게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인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밝힌다. 민간인 학살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에둘러 사과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 부총재였던 박근혜 대통령은 이튿날 개인 명의의 성명을 내어 “(대통령의 발언은) 대한민국의 명예에 못을 박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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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김 대통령의 사과는 양국의 외교협상에 따라 나온 것은 아니었다. 1992년 두 나라의 수교 때 전쟁배상 문제가 제외된 이래 전쟁 문제는 애초부터 두 나라의 현안이 아니었다. 베트남이 전쟁을 기본적으로 미국과의 관계로 간주한데다 승전국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기조는 지금까지도 계속된다. 양국은 민간인 학살 조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은 ‘불완전한 진실’에 가깝다.

진실에 다가서려 노력한 곳은 시민단체였다. 1999년부터 베트남 양민학살 진상규명위원회, 베트남 진실위원회,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등의 활동을 하면서 평화운동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전쟁 피해자인 군대위안부 출신 고 문명금 할머니의 성금을 종잣돈으로 설립된 평화박물관은 2000년대 초반부터 베트남에서 어린이도서관 건립, 장학금 지원 등의 사업을 벌였다. 치과의사와 한의사들로 구성된 베트남평화의료연대는 매년 베트남을 방문해 진료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인터넷 페이스북에서 자발적으로 결성된 ‘베트남과 한국을 생각하는 시민모임’은 피해 마을의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을 모금하고 있다. 베트남에서 시작한 평화운동은 일상으로 확장됐다.

“아이들이 팜티호아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가장 마지막에 만난 한국인이었어요. 35년 전 일을 들은 아이들이 울었지요.”

여행 대안학교인 ‘로드스꼴라’의 김현아 대표교사가 3일 말했다. 아이들은 매년 한달 베트남을 여행한다. 그때 빠지지 않는 것이 민간인 학살지를 방문하는 것이다. 지난 4월엔 학생 13명이 하미 마을을 찾았다.

아이들은 베트남에서 ‘증오비’도 목도했다. 한국군의 살상이 벌어진 마을 주민들이 세운 것이다. 베트남 전역에 약 50~60개가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바다 건너 한국에는 베트남전 참전탑이 세워진다. 참전군인 단체 등에서는 2000년대 들어 ‘월남 참전탑’ 설립 붐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앞을 비롯해 충남 부여, 강원도 홍천, 전북 전주와 정읍 등에 참전탑이 있다.

베트남전쟁의 역사는 우리에게 어떻게 남아야 할까? 베트남 정부도 한국 정부도 이 일을 들추길 꺼린다. 평화박물관은 호찌민의 베트남전쟁기념관과 공동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국내의 베트남전 참전기념탑과 베트남의 증오비 사진을 모아 전시하는 것이다. 두 나라는 같은 사건을 여전히 다르게 기억한다. 두 기억은 어떻게 접점을 찾을까.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