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전탑 주변에 저의 전 재산이 다 있습니다. 그것을 다 버리면 고생하고 일궈놓은 토지를 황무지로 만들어버리는 거고 그렇게 하면 제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싶어서….”
경남 밀양 주민 서홍교(83)씨의 들릴듯 말듯한 작은 목소리엔 절망감이 녹아 있었다. 3일 오후 서울 동교동 가톨릭청년회관에서 열린 밀양 송전탑 건설 예정지 주민들의 인권·건강 실태 보고대회에는 서씨 등 3명의 주민이 자리했다. 밀양에서 고추농사를 지어온 김영자(57)씨는 끝내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지은 고추가 도시로 가서 밥상 위에 올라간다는 자부심으로 농사 짓고 살았어요. 올해 고추는 (송전탑) 공사가 강행되면서 잘 봐주지 못하니까 다 타버렸지만 내년에 다시 지으면 되죠. 하지만 송전탑은 (철회) 시기를 놓치면 자손 대대로 후회할 것 같아서 공사현장으로 돌아갑니다.”
이처럼 송전탑 건설로 땅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주민들이 심각한 신체적·정신적 외상을 겪고 있다고, ‘밀양 송전탑 인권침해조사단’이 이날 밝혔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다산인권센터 등 인권단체들과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건보련) 등으로 구성된 인권침해조사단이 6월6~9일 밀양 송전탑 건설 예정지 부근 4개 마을 79명의 주민을 대상으로 건강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의 고위험군에 속하는 주민이 69.6%에 이르렀다. 전쟁·자연재해·폭행 등 심각한 사고를 목격하거나 경험한 이후 나타나는 정신적 외상에 10명 중 7명꼴로 노출돼 있다는 얘기다. 조사단은 “이는 9·11 테러를 겪은 미국 시민들에 비해 4.1배, 내전 당시 레바논 시민들에 견줘 2.4배 높은 비율”이라고 설명했다. 이상윤 건보련 정책위원은 “재산상 피해보다 땅에 대한 애착, 공동체에 대한 애정들이 정신심리 이상의 주된 요인이었다. 도시민 등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그들에겐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라고 말했다.
또 인권침해조사단은 밀양 10개 마을의 주민 132명을 대상으로 인권침해 실태를 조사한 결과, 송전탑 건설 협의 과정에서 한국전력·시공사 쪽이 주민들과 합의 절차를 충분히 거치지 않았다고 밝혔다. 조사단은 “한전에서 2005년 8월 4개면을 대상으로 126명이 참여한 주민설명회를 실시했지만 주민설명회에 참여한 주민들은 송전선로가 통과하는 5개면의 총 인구 2만여명의 0.6%에 그치는 등 설명회가 요식행위였다”고 지적했다.
한전이 용역을 동원해 공사를 강행하고 주민들을 업무방해 등을 이유로 39번이나 고소하면서 주민들의 신뢰를 잃었다는 분석도 나왔다. 이밖에 70살 이상 노인들의 노후대책이 사라지는 등 재산권 침해도 심각하다고, 조사단은 밝혔다.
박진 다산인권센터 활동가는 “밀양 송전탑 건설사업 추진과정에서 뒷짐 지고 있었던 정부와 국회가 나서야 한다. 심리적·신체적 피해에 적절한 대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파국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최유빈 기자 y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