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던 직장이었다. 지난 10월 정명진(가명·27)씨는 대기업 계열사 공채에 합격했다.

다른 이들이 합격의 기쁨을 만끽할 때 정씨는 근심에 잠겼다. 정식 채용 직전, 신체검사를 거쳐야 했다. 연수기간 중 회사가 나눠준 채용신체검사표엔 ‘인체 면역결핍 바이러스’(HIV) 검사 항목이 포함돼 있었다. 정씨는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감염인이다.

“채용 전엔 그런 검사를 하는지 몰랐어요. 병원에선 ‘회사가 꼭 포함시키라 했다’더군요.” 에이즈 감염인의 권리 보장 등을 위해 제정된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 제8조1항은 “검진을 실시한 자는 피검진자 본인 외의 자에 대해 검진결과를 통보할 수 없다”고 정하고 위반시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고 있다. 정씨가 합격한 대기업 계열사가 법을 위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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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는 해당 병원에 변호사의 자문을 담은 의견서를 보냈다. 병원은 에이치아이브이 검사 결과를 제3자인 기업에 통보하는 일이 불법이란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결국 회사 쪽은 에이치아이브이 검사를 신체검사 항목에서 제외했다. 정씨는 최종 합격했지만 불안은 여전하다. “앞으로 직장검진을 받을 때마다 감염 사실이 알려질까봐 두려워하겠죠.”

세계 에이즈의 날(12월1일)을 앞두고 “일할 권리를 보장해달라”는 에이즈 감염인들의 목소리가 높다. 국내 에이즈 감염 인구는 2006년 4500여명에서 2011년 8500여명으로 늘었다. 이 가운데 한창 일할 나이인 20~30대가 절반이 넘지만, 감염인들은 사회활동을 접은 채 빈곤층으로 추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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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용신체검사’와 ‘직장검진’은 이들의 사회활동을 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에이치아이브이 검사는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의무적으로 제공해야 하는 일반건강검진 항목에 속하지 않는다. 이 검사가 채용신체검사 또는 직장검진에 포함되는 것은 병원들이 ‘서비스 차원’에서 추가하거나 기업이 병원에 해당 검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에이즈 감염인들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감염 사실이 기업에 전달돼 정상적인 직장 생활에서 멀어지게 된다.

에이즈를 ‘무시무시한 전염병’으로 바라보는 일반의 편견과 달리 그 전염성은 극히 낮다. 콘돔 없이 성관계를 해도 전염 확률은 1000분의 1 수준이다. 감염된다 해도 생존율이 82.2%로 높아 꾸준한 치료를 병행하는 감염인은 사회활동에 지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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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재 인하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치료 기술이 발전해, 외국에선 에이즈를 고혈압이나 간염처럼 관리할 수 있는 만성질환의 하나로 분류하고 있다. 의학적 중증도는 당뇨병과 비슷한 등급이어서 직장 생활에 무리가 없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회사를 다닐 정도의 건강이 유지되고 있는 감염인을 에이치아이브이 검사로 ‘솎아내려는’ 기업의 검진 제도는 차별과 낙인의 폐해만 양산한다”고 지적했다.

몇 년 전까지 서울의 어느 중견기업에서 일했던 ㄱ(46)씨는 정기 직장검진 이후부터 자꾸 인사팀에 불려갔다. ㄱ씨가 에이즈 감염자인 사실을 파악한 인사팀은 “건강검진 결과, 우리 일에 적합하지 않은 걸로 나왔다”고 말했다. 직장을 그만둔 ㄱ씨에겐 의지할 가족도 없었다. 그는 기초생활수급 자격을 얻어 치료비를 감당하고 있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되면 에이즈 치료약 값이 무료다. 그러나 일단 수급자가 되고나면 다시 일자리를 얻어 정상적 사회활동을 하는 일은 멀어진다.

ㄱ씨와 같은 기초생활수급 에이즈 감염인은 2008년 962명에서 2011년 1210명으로 늘었다. 전체 감염인의 14%가 넘는다. 감염인들의 취업을 돕기 위한 정부의 자활 지원 예산은 3년째 연간 8000만원에 머물러 있다. 에이즈 인권연대 나누리플러스 권미란 활동가는 “질병관리본부가 기업·기관·병원들의 에이치아이브이 검사 실태를 조사해 이를 적극 교육·단속하고, 정부의 자활 지원 예산도 실질적 수준으로 늘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