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순·미선양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지 10년이 됐다. 한-미동맹의 본질이 무엇인지 물었던 이 사건으로 사상 첫 촛불집회가 열렸고, 그 열기는 2002년 12월 대선까지 이어졌다. 지난 6일, 두 소녀가 살았던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를 찾아갔다.

“아이들 잘못…조용히 추모할 것”유가족들 10년 세월에 지친 기색언론·사회단체 관계자 접촉 기피

경기 양주시 광적면 효촌2리 마을의 이웃은 군부대와 장갑차 훈련장이다. 효촌2리를 끼고 돌아가는 56번 지방도로에는 육중한 장갑차가 수시로 다닌다. 마을을 사이에 두고 북쪽(파주시 적성면 무건리)과 남쪽(양주시 광적면 덕도리)에 장갑차 훈련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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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에게 56번 도로는 시내로 통하는 길이기도 하다. 장갑차가 다니는 도로의 갓길을 걸어 양주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타러 간다.

10년 전 6월13일 오전, 이 도로의 갓길을 따라 심미선(당시 14살)양과 신효순(당시 14살)양이 걷고 있었다. 두 소녀는 무건리 훈련장에서 덕도리 훈련장으로 향하던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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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장갑차가 하도 다니니까 아이들도 그냥 그르렁그르렁하고 지나가는 줄 알았을 것”이라고 마을의 한 주민은 말했다. 그날따라 다른 게 있었다면, 장갑차 두 대가 좁은 2차선 도로를 한번에 교차하여 지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두 대의 장갑차만으로 도로와 갓길이 가득 찼고, 두 소녀는 피할 곳 없이 참변을 당했다.

그들은 근처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영미(가명)네 집에 생일잔치를 하러 가던 길이었다. 2002년 6월13일, 효순양은 생일을 하루 앞두고 있었다. 미선양은 효순양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 영미네 집을 불과 300여m 남기고 두 소녀의 짧은 삶이 멈췄다. 56번 지방도로에 인도가 생긴 것은 두 소녀가 세상을 뜬 다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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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찾은 효순양의 어머니 전명자(50)씨는 10년 전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 자체를 불편해했다. 서울에서 10주기 추모제가 열린다고 전했으나, 잘라 말했다. “갈 수가 없지요. 아니, 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기자를 빨리 돌려보내려는 생각이었는지 전씨는 죽은 아이들의 탓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군이 잘못한 게 아니에요. 아침에 훈련하는 줄도 모르고 그 좁은 길을 따라 걸어간 게…. 우리 애들이 실수한 거예요.”

논두렁에서 양수기를 고치던 아버지 신현수(58)씨는 깡마른 얼굴을 들어 기자를 쳐다본 뒤 서둘러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분명히 전했다.

미군 장갑차 시야서 사라졌지만한국군 탱크는 꾸준히 지나다녀

미선양의 집에서 만난 오빠 심규진(28)씨도 취재를 반기지 않았다. “이용당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추모해주시는 건 고맙게 생각하지만 가족 모두 이젠 조용히 개인적으로 추모하고 싶어요.” 아버지 심수보(58)씨는 만날 수 없었다. 마을 이장을 오래 맡았던 아버지 심씨는 언론은 물론 사고 당시 진상규명을 위해 애쓴 시민단체 관계자들도 만나지 않으려 한다고 주변 사람들이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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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6월13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린 1주기 추모대회에 참석한 두 아버지는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소파)을 개정해 이런 일이 두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사고를 낸 장갑차 운전병과 관제병은 사고 5개월 만인 11월 미 군사법원에서 무죄 평결을 받고 미국으로 출국했다. 그러나 ‘공무집행 중에 일어난 미군 범죄의 1차적 재판권을 미국이 갖는다’는 소파 규정 탓에 한국 정부는 이들에게 아무런 책임을 물을 수 없었다. 무력한 정부 앞에 어린 두 딸의 죽음은 개인의 비극으로만 남았다. 미선·효순양의 부모들에게 무기력을 안긴 그 조항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다.

미선·효순양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서로 이웃하여 살아온 두 가족의 불행은 현재진행형이다. 효순양의 아버지 신씨는 2년 전 위암 수술을 받았다. 수술 직후 폐에 공기가 차서 지난 5월 다시 수술을 받았다. 70㎏이던 몸무게가 지금은 50㎏으로 줄었다. 지난해 추석을 맞아 고향집을 찾은 효순양의 작은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떴고, 같은 날 등산을 하던 미선양의 작은아버지도 실족사했다. 가족들은 점점 입을 닫았다.

10년 전, 이 작은 마을에서 ‘촛불’이 시작됐다. 근처 의정부여고 학생들이 촛불을 들고 집회를 열었다. 2004년 탄핵반대, 2008년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반대 등을 위해 모였던 ‘촛불 소녀’의 원형이 효촌리에 있다. 2002년 12월19일 <한겨레>에는 촛불집회에 참가한 여고생들 이야기가 실렸다. 강미정(28)씨는 그 가운데 한명이다. 의정부여고에는 미선양의 언니가 다니고 있었다. 당시 고3이던 강씨는 촛불집회에 적극 참여했다.

왕년의 촛불 소녀는 이제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생활인이 됐다. 강씨는 보습학원장이자 프리랜서 아나운서다. “고등학교 때는 목소리도 크고 성질도 급하고 되게 활달했어요. 그런데 세상에 부딪쳐보니 현실이 제 생각과는 너무 달랐고, 그렇게 조금씩 침묵하게 된 것 같아요.” 촛불은 불타올랐지만 변한 건 많지 않다. 당시 국민들이 개정을 요구한 소파의 불평등 조항 대부분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소한 변화가 없지는 않다. 미선·효순양 덕에 효촌리 주민들은 관제병 없이 운전하는 미군 장갑차를 보지 않아도 된다. “한국군은 장갑차 1대가 지나가도 관제병이 2명은 붙었는데, 미군은 그런 게 없었지. 사고 이후로는 미군이 눈치를 많이 봐. 밤에 주로 다니는 것 같아.” 영미씨의 아버지는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그때는 미군 장갑차들이 6인치짜리 포탄을 쏠 때마다 임신한 소들이 유산했어. 동네 임산부들도 사격 시간이 되면 산으로 올라갔다니까.”

그러나 주민들을 겁먹게 했던 미군 장갑차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미군 장갑차는 파주에 있는 미군 전용 다그마노스 전차 훈련장으로 향한다. 파주에는 미군만 훈련하는 스토리 사격장도 있다. 미군 훈련 과정에서 또다시 한국인이 희생당해도 미선·효순양 사건에 적용한 소파 규정에 따라 미군은 자체 군사법원에서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다.

미군 장갑차는 볼 수 없어도 한국군 탱크는 꾸준히 효촌리 마을을 지나다닌다. 근처 무건리 장갑차 훈련장은 560만평에 이르는 면적을 1100만평으로 확장할 계획이다. 120여가구 600명가량의 주민은 쫓겨날 일만 기다리고 있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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