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솔국치 100년 새로운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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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기(89)씨는 먼 혼돈 속에서 취재진을 맞았다. “야자나무, 야파(야자나무 잎을 엮어 만든 집)라고 집을 지오. 칼 꼽고 있어서 지키라고 안했나…. 아휴, 아휴…, 그거 이제 우리는 모른다. 이래 돼서 자세히 모른다.”

조선 출신 포로감시원 배치 경로
조선 출신 포로감시원 배치 경로

뭔가를 설명하려던 김씨는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닫았다. 그가 전달하려 했던 말들은 결국 언어화되지 못했고, 인터뷰도 그렇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곁에 앉은 부인 정인순(73)씨가 김씨의 이마를 수건으로 닦으며 “영감이 3년 전에 풍을 얻어 거동도 힘들고 정신도 왔다갔다 한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김씨는 한국에 생존해 있는 유일한 비시(B·C)급 전범이다. 그는 태평양전쟁기에 네덜란드 식민지이던 지금의 인도네시아 자바섬 마카사르 농장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을 때렸다는 이유로 전범 재판에 회부돼 7년형을 선고받고 전범이 됐다. 일본에는 조선인 비시급 전범들의 자조모임인 ‘동진회’를 중심으로 여러 명이 생존해 있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전범은 모두 죽고 김씨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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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1921년 경남 창원군 진북면 덕곡리에서 4남3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스무살이던 1942년 5월 일본의 남방(동남아시아·남태평양) 진출로 생긴 26만1천여명의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는 포로감시원(군속) 모집시험을 쳐 합격했다. 전쟁터에 끌려가느니 ‘근무기간 2년, 한달 월급은 50원’에 새로운 경험을 해보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김씨 또래의 식민지 청년 3223명이 합격 통지서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이들은 1942년 6월 부산 서면 임시군속교육대(지금의 하얄리아 부대 터)에서 두달 동안 훈련을 받고 1942년 8월19일 동남아시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김씨가 배치된 곳은 자바섬의 마카사르농장이었다. 김씨는 이곳에서 일본군에 붙잡힌 영국·오스트레일리아·네덜란드군 병사들을 감시하는 일에 내몰렸다. <한겨레>가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네덜란드군이 작성한 자바 전범재판소의 재판기록을 확인한 결과, ‘가네무라 뎃키’라는 창씨명을 썼던 김씨는 ‘1943년 4월1일부터 45년 1월까지 주먹, 두꺼운 대나무 몽둥이, 개머리판, 나무 등으로 포로들을 때린’ 혐의로 기소됐고, 1948년 5월4일 7년형을 선고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김씨는 “우리 부대에는 가네무라가 네명 있다. 나는 요리사였다”고 항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씨의 부인은 “바깥양반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는 얘길 기력이 없어질 때까지 몇번이고 했다”고 말했다. 김씨처럼 전범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조선인은 148명이었고, 이 가운데 절대다수인 129명(사형 14명)이 김씨 같은 포로감시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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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지피낭 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김씨는 1950년 1월23일 도쿄 이케부쿠로의 전범수용소 ‘스가모 형무소’로 옮겨져 1950년 9월12일 가석방됐다. 석방된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기막힌 생활고였다. 생활고를 이기다 못해 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나마 일본에 기댈 곳이 있던 이들은 남았지만 정말 갈 곳이 없던 사람들은 ‘친일파’라는 사회적 냉대를 감수하며 당시 세계의 최빈국 가운데 하나였던 고향행을 택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전범들이 택한 것은 기나긴 침묵이었다. 김씨의 큰딸(47)은 “최근까지 아버지가 전범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말했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의문투성이의 인물이었다. 그를 기겁하게 만든 것은 눈을 뜨고 잠드는 버릇이었다. “뭐라긴요. ‘그렇게 안 하면 죽는다’는 거죠. 그땐 무슨 말인지도 몰랐어요. 예전에 진해에 살 땐 도둑이 눈뜨고 잠든 아빠를 보고 도망치는 일도 있었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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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의 부인 정인순씨는 50년대 마산 성지여고를 졸업한 ‘엘리트 여성’이었다. 정씨는 “나름 좋은 혼처를 기다린다고 이것저것 재다가 당시로는 혼기를 넘긴 25살의 나이에 5촌 당숙모의 소개로 김씨를 만났다”고 말했다. “그때 영감이 결혼하고 다시 일본으로 들어간다는 얘기를 해서 친정에서 허락했죠. 그런데 막상 일이 그렇게 안 됐어요. 그래서 사네 못사네 엄청 싸우고….” 정씨는 “나이도 처음에는 9살 차이라고 했는데, 첫아이를 낳고 보니 15살 차이였다”고 말했다.

오랜 외지 생활에서 돌아온 김씨는 한국말을 거의 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번듯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고, 공사판을 전전하며 막노동으로 가족을 부양했다. 이후 60년대 말에 겨우 대림요업에 취직돼 1978년 퇴직했다. 김씨의 사위 장경성씨는 “장인이 왜 다시 일본으로 입국하지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평소 데모를 많이 했다’는 장인의 말로 비춰봐 일본 정부가 장인을 과격한 상이군인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조국을 떠날 때 스물하나였던 청년은 19년 동안의 모진 방랑을 마치고 서른아홉에 귀국했다. 그는 이듬해인 1962년에 결혼했고 머잖아 큰딸을 낳았다. 김씨는 이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로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1년에 80만원 정도 의료지원금을 받는다. 정씨는 “이 양반이 한이 많아 옛날엔 고생했던 얘기도 많이 했는데 그 사연을 자세히 못 들어 준 게 제일 미안하다. 내 인생이나 영감의 인생이나 불쌍해 지금도 가끔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창원/글·사진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BC급 전범이란전쟁중 비인도적 행위자…조선인 148명 처벌

‘비시(B·C)급 전범’은 한국인들에게는 아직 낯선 말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승리를 거둔 연합국은 전쟁기간에 벌어진 독일과 일본의 ‘전쟁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군사재판을 열었다. 그 재판의 규칙이 되는 군사재판조례는 전쟁범죄의 형태를 에이(A)항 ‘평화에 반하는 죄’, 비(B)항 포로 학대 등 ‘통상의 전쟁범죄’, 시(C)항 ‘인도에 관한 범죄’ 등 3가지 형태로 구분했다.

에이급 전범은 도조 히데키(1884~1948) 등과 같이 침략전쟁을 일으키는 데 직접적으로 가담한 전쟁 지도자, 비시급 전범은 전쟁 수행과정에서 전쟁 법률·관습을 어기거나 비인도적 행위를 저지른 장교·사병 등이었다.

전후 비시급 전범으로 처벌받은 사람은 5700여명(사형자 984명)인데, 이 가운데 조선인은 148명이었다. 그중에 절대다수인 129명이 남방에서 연합군 포로를 다루던 포로감시원이었다.

이들의 문제가 한·일 사이에 풀어야 할 역사적 과제가 된 것은 해방 이후 일본 정부가 보여준 무성의한 조처 때문이다. 일본은 “처벌받을 때는 일본인이었지만, 이제는 국적을 잃었다”며 이들을 원호 대상에서 제외했다. 결국, 조선인 전범들은 1955년 서로 뭉쳐 같이 잘살아보자라는 뜻으로 ‘동진회’(同進會)라는 모임을 만들어 일본 정부를 상대로 투쟁에 돌입하게 된다.

일본 정부는 이들에게 공영 주택을 제공하는 등의 조처를 내놓지만, 1965년 한일협정을 체결한 뒤에는 태도를 바꿔 아예 대화 창구를 닫아버렸다.

결국 동진회는 1991년 11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에 나섰지만, 일본 법원은 “우리나라(일본) 군인·군속 및 그 유족에 대한 원호 조치에 상당하는 조치를 강구할 것이 요망된다”면서도 “이는 국가의 입법 정책에 속하는 문제다”라며 소를 기각했다.

일본 민주당은 사법부의 권고를 받아들여 야당 시절, 생존 조선인 비시급 전범과 그 후손에게 일시금으로 300만엔(3600여만원)의 위로금을 주는 법안을 발의했다. 이 법은 올해 초 일본 국회를 통과할 예정이었지만, 경기침체와 정치자금을 둘러싼 정치인들의 스캔들로 민주당 인기가 추락하면서 연내 통과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길윤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