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관악구 은천동(옛 봉천본동 지역) ‘현대시장 네거리’.
보라매공원에서 숭실대 방향으로 가는 도로는 항상 길이 막혔다. 왕복 3차선 도로인 데다, 네거리에서 직진해 10m 정도 나아가면 수시로 시내버스(5612번)가 편도 1차선 도로를 꽉 막고 있어 뒷차들은 옴짝달싹 못했다.
주민들은 불평이 많지만, 시내버스 회사 쪽도 할말이 있다. 네거리를 통과한 뒤 버스들은 ‘비보호 좌회전’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중앙선 건너쪽에 종점 차고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길이 뻥뻥 뚫리기 시작했다. 버스 운전기사들이 ‘교통위반’을 시작한 덕분이다. 기사들은 파란 신호를 받은 뒤에도 곧바로 네거리를 통과하지 않고, 교차로의 오른쪽으로 살짝 비켜주기 시작했다. 뒤따라오는 차들이 네거리를 모두 통과한 뒤에야 네거리를 지나다 보니 교통 정체가 사라진 것이다. 교통경찰 등 다른 누군가의 지시도 없이 기사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교통 정체를 해소한 셈이다.
버스가 파란불일 때 잠시 비켜서 있는 곳은 횡단보도 옆이라, 엄밀히 말하면 ‘주·정차 위반’이지만 이를 탓하는 이는 없다. 경찰도 단속보다는 운전기사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인근 관악경찰서 봉천지구대의 안찬식 지구대장은 “주·정차 위반이기는 하지만, 이 길이 원래 좁아 늘 교통 경찰관들의 골치거리였는데 운전자 스스로 해법을 찾아주니 고마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풍양운수 소속 5612번 운전기사들의 교통위반은 지난해 여름 한두 명이 먼저 시작했다. 지금은 대부분이 동참하는 ‘정착’ 단계에 이르렀다. 15년째 이 노선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는 명완식(61)씨는 “항상 우리 때문에 도로가 막히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는데, 고민 끝에 한두 명이 먼저 시작했다”며 “우리 때문에 도로가 뚫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인근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김성훈(56)씨는 “기사분들 덕분에 만성 정체길이 시원하게 뚫려 동네 이미지도 많이 개선됐다”며 흐뭇해 했다.
김연기 기자 yk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