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철 변호사(전 삼성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가 삼성이 비자금을 관리한 것으로 의심되는 차명계좌의 번호까지 공개하며 수사를 촉구했는데도 이를 규명할 사법 및 금융당국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를 대며 조사를 하지 않고 있다. 이에 법률 전문가와 시민단체 등은 검찰과 금융당국이 삼성과 은행 쪽에 증거를 없앨 시간을 벌어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지난 6일 삼성 비자금 조성 의혹 고발장을 접수한 검찰은 이틀이 지난 8일 이 사건을 서울중앙지검에서 수사하도록 이첩했다. 그러나 검찰은 이날도 “삼성 로비 대상 검사 명단을 검찰에 넘기지 않으면 사건을 배당할 수 없다”며 수사 착수를 여전히 미루고 있다. 검찰은 “사건이 배당돼야 금융기관 계좌조사 요청도 할 수 있다”며 기본적인 사실 관계 확인에도 나서지 않고 있다.
금융실명제법 위반 여부를 감독해야 할 금융감독 당국도 차명계좌 조사에 착수조차 하지 않고 있다. 홍영만 금융감독위원회 홍보관리관은 지난 7일 브리핑에서 “우리은행과 굿모닝신한증권이 자체 조사를 하고 있다. 그 결과를 통보받은 뒤 검사 착수 여부를 판단할 계획”이라고 은행 쪽에 책임을 돌렸다. 금융감독원 고위 관계자는 “검찰이 나서면 금융실명제법 위반을 비롯해 모든 의혹을 풀 수 있는 만큼, 검찰에서 지원 요청이 있으면 협조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검찰은 “다른 기관에서 검찰의 조사 요청을 조건으로 달더라도 그건 그쪽 사정이다. 우리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검찰과 금융감독 당국이 조사를 미루는 동안, 삼성과 차명계좌를 개설한 은행 쪽이 증거인멸과 말맞추기를 할 가능성이 많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수부 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은행이 김용철 변호사 명의의 차명계좌 가운데 일부를 공개하지 않는 것을 보면 언제든지 해당 계좌를 흔적도 남기지 않고 없앨 수 있다고 봐야 한다”며 “삼성도 관련자들이 말을 맞출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참여연대도 이날 서울 여의도 금감원 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금감원의 조사가 늦어질수록 우리은행과 굿모닝신한증권으로선 차명거래 은폐를 위한 시간을 벌게 된다”며 “해당 은행들의 자체 검사 결과와 검찰의 조사 요청을 기다리는 것은 금감원의 중대한 직무유기”라고 주장했다.
차명계좌 공모 의혹을 사고 있는 은행들도 이런저런 이유를 내세우며 조사를 하지 않고 있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김 변호사의 주민등록 사본이 있고, 예금거래 신청서와 출금 전표에 김 변호사의 도장이 찍혀 있다. 결국 금융실명제법 위반 여부를 알려면 김 변호사 본인이 계좌를 개설하고 입출금을 했는지를 확인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김 변호사가 직접 은행을 방문해야 한다”고 말했다. 굿모닝신한증권 관계자도 “계좌를 개설해준 직원이 이미 퇴사를 했는데 연락이 닿지 않아 금융실명제법 위반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김남일 김경락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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