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저녁 경기도 고양시 4·16안전사회연구소 사무실에서 장훈 소장이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지난 2일 저녁 경기도 고양시 4·16안전사회연구소 사무실에서 장훈 소장이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준형이 아빠”.

2014년 4월16일, 그날 이후 10년 동안 장훈 4·16안전사회연구소장에게는 아들의 이름이 따라붙었다.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과 진상조사분과장 등을 맡았던 그는 2021년 가을부터 4·16안전사회연구소를 설립하고 우리 사회의 안전을 보장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최근에는 다른 유가족 등과 함께 10년의 세월호 참사 기록을 살펴 정리한 ‘책임을 묻다’를 쓰기도 했다. 누구보다 진상규명을 바랐고 세차례의 세월호 참사 조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장 소장을 지난 2일 저녁 경기도 고양시 4·16안전사회연구소에서 만나 지난 10년 진상규명의 성과와 한계에 대해 물었다.

가족과 시민의 힘으로 탄생한 특조위

세월호 참사 조사의 불씨를 틔운 것은 유가족들이었다. 어렵게 틔운 불씨에 시민들의 염원이 더해져 탄생한 것이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2015년 3월~2016년 9월)였다. 유가족의 단식과 600만명이 넘는 시민의 서명으로 2014년 11월 세월호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특조위 설립을 방해했다. 자연스레 특조위의 당면 과제는 ‘생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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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의 방해 끝에 특조위는 설립준비단이 요구한 인력과 예산이 대폭 축소된 채 출범해야 했다. 이석태 위원장이 임명된 것은 2015년 3월이었고, 같은 해 8월에야 조사를 위한 인적·물적 구성이 완료됐다. 이후에도 청와대는 보수단체 등에 특조위 비판 활동을 종용했고,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참사 당일 행적 조사 등 청와대 관련 사건 조사를 막았다. 또 특조위 구성일을 세월호 특별법이 시행된 2015년 1월1일이라고 주장하며 2016년 6월30일 조직을 강제 해산하고 3개월의 백서 작성 기간만 허용했다. 세월호 특별법에는 특조위 활동 기간이 ‘구성일 마친 날로부터 1년6개월(기본 1년, 연장 6개월)’이라고 규정되어 있어 2015년 8월부터 활동 기간을 계산해야 하지만 정부가 자의적으로 법 시행일을 기준 삼아 조직을 해산한 것이다.

장 소장은 “청와대, 해양수산부, 특조위 파견 공무원 등이 힘을 합쳐 조사 방해에 나섰고 박근혜 정부는 결국 특조위를 강제 해산했다. 특조위가 마땅한 성과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조사의 결과물인 ‘종합보고서’가 나오지 않은 것이 가장 뼈아픈 대목이다. 장 소장은 “특조위에서 진행한 3차례 청문회에서 여러 사실이 밝혀지는 등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보고서조차 나오지 않아 가족 입장에서는 실망이 컸다”고 털어놨다. 우리 사회가 참사 조사를 제대로 해본 경험이 없었던 것도 큰 제약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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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몰 원인 결론 못 낸 선조위·사참위

참사 1073일 만인 2017년 3월23일 이뤄진 세월호 인양은 미수습자 수습과 진상규명을 한걸음 더 나아가게 한 큰 계기였다. 세월호 육상 거치 이후 이뤄진 수색 작업을 통해 당시까지 미수습자로 남아 있던 9명 중 4명의 유해를 수습할 수 있었다. 아울러 세월호를 육안으로 직접 살필 수 있게 됐다. 정부가 세월호 인양 결정을 내린 2015년 4월부터 선체 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박근혜 탄핵’이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본격 인양을 앞둔 2017년 3월 국회에서는 세월호 선체조사 특별법이 통과될 수 있었다. 그 결과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선조위·2017년 3월~2018년 8월)가 만들어졌다. 장 소장은 선조위에 대해 “무엇보다 바다에 잠겨 있던 블랙박스와 희생자들의 휴대전화 등 디지털 기기에 남은 영상을 복원해서 세월호 당시 상황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 큰 성과였다. 영상을 통해서 침수 경로, 사고 당시 배의 기울기 등도 추정이 가능해졌다”고 말했다. 네덜란드 해양연구소 ‘마린’에서 세월호 모형을 만들어 방향타와 추진기 등을 제어하며 조종하는 시험(자유항주모형시험)을 한 것도 큰 성과였다. 이 실험을 통해 세월호의 급선회와 침수 등을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선조위는 여러 내부 갈등 끝에 두개의 종합보고서를 내고 말았다. 낮은 복원력과 조타 장치 이상 등을 침몰 원인으로 보는 ‘내인설’과 잠수함 충돌 등 외력의 가능성에 무게를 둔 ‘열린 안’이 동시에 제출된 것이다. 장 소장은 “시간이 짧은 것이 너무 안타까운 부분이었다. 조금만 더 합의할 시간이 있었으면 한개의 종합보고서가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두 의견이 회의에서 격렬하게 부딪혔다. 그럴 땐 냉각기를 가지고 다시 논의를 해야 하는데 시간에 쫓겨 그럴 수 없었다. 한 달만 더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당시 상황을 이야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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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의 보고서가 나온 건 내부 갈등 탓이 컸다 . 장 소장은 “선조위에는 앞선 특조위에 참여했던 조사관과 해양 ·선박전문가들이 함께 있었다 . 이들 사이에 ‘너희가 조사에 대해서 뭘 아냐’ ‘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아냐 ’는 식의 업신여김이 있었다 . 해경과 선원의 책임 등 여러 주제에서도 다양한 갈등이 있었지만 제대로 조율되지 못했다 ”고 회고했다 .

선조위가 두개의 결론을 내놓은 것은 특조위 강제 해산으로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진상규명을 이어가기 위해 설립된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2018년 12월~2022년 9월)에도 영향을 미쳤다. 외력설에 조사가 집중된 것이다. 장 소장은 “국가 조사기구가 여러 의혹을 조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사참위는 기각해야 할 외력설을 계속 끌고 갔다. 세월호 항적 조작에도 계속 매달렸는데, 항적이 조작됐으면 지금까지의 조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월호 급선회 여부조차 확인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에 커다란 음모가 있고, 그 음모를 숨기기 위해 항적과 선체, 디지털 기기를 조작했다는 확증편향이 존재했던 것이 문제다”라고 평가했다. 다만 장 소장은 “사참위도 성과가 많이 있었다. 청와대, 국정원, 기무사 등 권력 기관의 문서 등을 열람하고 그 기록을 조사 자료로 남겼다. 디지털 기기 복원도 추가로 이뤄졌다”고 말했다.

■ “세월호는 바퀴 빠진 화물차였다”

세차례에 걸친 조사는 분명 많은 성과를 거뒀지만, 제대로 된 결론을 내지 못한 한계가 뚜렷했다. 유가족 사이에서도 세월호의 진실에 대한 생각이 저마다 다르다. 장 소장은 “가족들의 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불법 증개축하고 평형수 조금 빼고 과적하고 고박이 불량했다고 내 아이를 잃었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시시한 이유로 보이는 것이다. 참사의 배경에 더 큰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아이에게 덜 미안할 수 있으니까”라고 말했다.

장 소장은 당시 세월호는 언제든 침몰할 준비가 되어 있던 배라고 생각한다. 그는 “세월호를 자동차로 비유하면 앞바퀴, 뒷바퀴가 모두 빠진 1톤 화물차에 화물 10톤을 실고 그 차를 처음 운전하는 기사가 급커브를 튼 것이다. 당시 세월호 상태가 이렇게 심각하다는 이야기를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과학자나 기술자가 있었다면 많은 유가족이 납득을 했을 것이다”라고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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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난 10년의 진상규명 과정이 “수많은 좌충우돌을 겪었지만 진실을 알기 위해 한걸음 더 나아간 시간”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에 대한 조사 경험이 더 안전한 사회를 위한 밑거름이 되길 빌었다. 장 소장은 “범법을 처벌하는 수사와 참사 원인을 밝히기 위한 조사는 다르게 가야 한다. 수사기관은 혐의 입증에만 주력하는데, 그러면 안전을 위한 고민은 삭제된다. 개개인을 처벌한다고 해도 우리 사회는 변화하지 않는다. 규정을 바꾸고 시스템을 바꾸는 데 기여하는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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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