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가난한 여성들에게만 그런 불운이 많이 닥치는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다.
2023년 11월26일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한국 정부가 ‘강제 성매매에 내몰린 필리핀 여성 3명의 권리를 보호하지 않고 범죄자 취급하며 2차 가해한 점’을 지적하며 배상을 권고했다. 이 권고는 최근 일이지만, 문제는 한국에서 반복돼온 것이기도 하다.
이고운 감독은 다큐멘터리 <호스트네이션>(2016년)에서 미군기지촌 인근 외국인 전용 클럽에서 벌어지는 ‘필리핀 여성 성착취 산업’의 구조를 다룬 바 있다. 주한 미군기지라는 판 안에서 필리핀 현지 매니저, 한국의 클럽 업주, 한국인 브로커 등이 필리핀의 젊고 가난한 여성에게 어떻게 덫을 놓는지 조망한 다큐다. 최근의 유엔 권고와 관련해 2024년 2월28일 이 감독을 화상 인터뷰했다.
빚을 지우고 성매매 안 할 수 없도록 하는 게 인신매매
—전북 군산, 경기 동두천과 평택 송탄 등에서 성착취 당하는 필리핀 여성들을 가까이 만났다. 클럽, 필리핀 현지 등 접근이 어려운 곳을 어떻게 취재할 수 있었나.
“다큐를 찍을 당시 ‘필리핀 주시걸’ 문제가 알려지면서 미 국무부가 ‘한국이 하는 건 인신매매다. 업소에 출입하지 말라’고 대응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군산 공군기지의 한 사령관은 군인들에게 업소 출입금지령을 내렸고, 클럽 업주들은 매출이 막막해졌다. 그때 업주 중 한 분이 목소리를 내고 싶었던 거다. 자신들도 미군과 긴밀한 협조하에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업소를 운영했던 건데, 미군이 이제 와서 ‘클럽 업주가 수혜자고 동시에 범죄 책임자’인 것처럼 구는 게 억울했던 거다.
업주는 또 ‘필리핀 여성들이 피해자인 것처럼 하는데 필리핀 가서 직접 봐라. 이들이 정말 순진한 피해자냐’라고 했다. 아마 내가 진짜 갈 줄은 몰랐던 것 같은데, 일단 필리핀에 가서 업주에게 현지 매니저를 소개해달라고 연락하자 다소 당황하며 매니저를 소개해줬다. 매니저가 운영하는 숙소에서 한 달 정도 필리핀 여성들과 함께 머물렀다.”
—실제로 보니 어땠나. 업주의 말이 어떻게 다가왔나.
“미 국무부가 보고서를 통해 인신매매를 정의한 걸 보면 폭력·납치·감금만이 인신매매가 아니라, 어리숙한 사람을 속여(강압, 강요, 사기로 유도) 부채를 지우고 덫을 만들어 강압적으로 성매매를 안 할 수 없도록 하는 것도 인신매매다. 월급에서 브로커·매니저·업주가 빼갈 돈이 있는 구조를 만들고, 도망치지 못하게 덫을 만드는 자체가 ‘현대 인신매매의 핵심’이다. 피해자가 ‘성매매 가능성을 알고 있었냐 아니냐’와 무관하게 인신매매다.
피해 여성들이 ‘성접대 가능성을 알았느냐’에 대해 얘기하자면, 그 스펙트럼은 정말 다양하다. 필리핀 사람 중에는 외국 주점에서 웨이트리스로 서빙하면서 노래하거나, 클럽·호텔·유람선·관광지 등에서 노래해 돈을 버는 사람이 실제로 많기 때문에 그걸 상상하고 오는 이들이 있다. 반면 어느 정도 유흥업소임을 인지하고 오는 사람도 있지만 이들도 피해자긴 마찬가지다. 업소에 간 첫날부터 여성을 길들이기 위해 업주와 지인들이 성폭행하는가 하면, 피해 여성들이 성 매수자와 방에 단둘만 남은 상황에서 겪는 이야기는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수준이다. 단순히 성욕의 문제가 아닌 권력의 확인, 잘못된 폭력 문화를 생각하게 만든다.”
유흥업소인 걸 알고 와도 ‘인신매매’인 이유
—이런 뉴스를 두고 늘 나오는 말이 ‘여성이 선택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한 사람에게 돈 벌 수 있는 선택지는 분명 여러 가지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선택지가 어떤 사람에겐 굉장히 큰 선택지로 다가온다. 어려서부터 평범하게 여러 개의 선택지를 만날 수 있다면 안 좋은 선택지를 고를 확률이 낮다. 그런데 너무 가난하고, 식구들은 궁지에 몰렸고, 나이는 어리고, 누군가 ‘노래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권유를 한다. ‘왜 가난한 여성들에게만 그런 불운이 많이 닥치는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다. 그 선택지를 거절하려면 보통 사람보다 훨씬 강한 의지력과 판단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흔치는 않을 것이다.”
—필리핀 여성 성 산업 구조의 핵심은 뭔가.
“산업의 근간은 ‘가난한 여성’이다. 필리핀의 섬 같은 곳에서 가난하다는 건 형제는 여러 명인데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고, 아이가 있는데 먹이질 못하는 수준이다. 식민지 시절에 부를 일군 몇 개의 가문이 부를 나누고, 대학을 나온 남성도 그럴듯한 직장을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하다. 그러니 친족끼리 품앗이해 먹고사는 식으로 생존하기도 하고 여성이 국외 취업하는 것이 생계의 핵심이 되기도 한다. 필리핀 특유의 모계·부족 중심 문화가 가톨릭 문화와 결합하면서, 사람들은 낙태를 하지 않고 아이를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할머니, 이모가 아이를 키우고 엄마는 돈을 벌러 간다.
이때 중요한 건 그 여성들이 한국으로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빚, 정서적 부채의 굴레가 생긴다는 것이다. 무일푼인 사람을 매니저 집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노래하는 영상을 찍어 비자를 받고 비행기에 태우기까지, 그 모든 과정에 부채가 생긴다. 일단 한국으로 와서 일을 거부하면 이 부채를 갚을 방법이 없다. 그렇게 몇 달 강요에 몰려 일해서 빚을 갚고 나면 수익이 생겨 가족에게 돈을 보낼 수 있게 된다. 이때는 부양하는 식구들이 자신이 돈을 벌 때까지 아끼며 기다려준 걸 생각한다. 부채감이 커진 상태인 것이다. 그렇게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며 ‘하루만 더 버티자’ 하다가 익숙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건 너무 심각하다’ 싶어 탈출하거나 구조되는 경우가 있는데, 소송을 건 사람들이 그런 경우일 것이다.”
—미군 기지촌 인근 클럽들이 많이 사라지면서 양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나.
“미군이 출입금지되니 외국인 노동자들이 또 와서 업소 고객이 됐는데, 그것도 지나가고 클럽들이 못 먹고살다 보니까 지방자치단체에 압력을 넣기도 한다. 지역 유지들이니까 ‘지역 경제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결탁해서 내국인 출입을 가능하게 한다든지. 외국인을 고용하는 한국 룸살롱이 된 거다.”
일제·미군·민주화 흔적 섞인 혼종적인 법제도
—관객들이 무엇을 생각해주길 바라며 다큐를 만들었나.
“모든 법·정부 안에는 디엔에이(DNA)가 있는데, 한국 법·정부 안의 DNA는 일본 제국주의의 흔적, 미군 주둔 흔적, 민주화가 돼서 시민의 권리를 위해 인권운동을 한 흔적이 다 섞여 있을 것이다. 미국도 남의 나라에 주둔하면서 성매매 생태계를 형성하는 제국주의적 면모가 있는가 하면, 클럽 업주들이 운영을 못하게 하는 착한 인권 중심 면모도 있지 않나. 복합적이다. 그럼 이럴 때 우리 정부는 어떤 면모를 키워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누구 책임이냐, 정부는 무엇을 개선하면 좋은가.’ 이런 건 분명 책임이 나눠져 있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필리핀 성착취 여성들을 ‘실용의 눈’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정의의 눈’으로 보고 우리나라가 그 DNA를 키워나가는 방향이 맞지 않을까 싶다.”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