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여름 무심코 켠 티브이에서 톰 크루즈가 말했다. “꿈을 이루려면…”
꿈을 이루려면, 꿈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화 ‘콜래트럴’이었다. 살인 청부업자 역의 톰 크루즈는 인질로 잡은 택시 운전사가 “돈을 벌어 어머니 병원비를 대야 한다”고 애원하자 “꿈이 뭐였느냐”고 묻는다. “리무진 택시회사를 차리는 것이었다”는 답에 톰 크루즈는 타박한다. “꿈만 꿨으니 내 인질이 됐지.” 그리고 결정적인 한마디를 날린다. “꿈을 이루려면 빚을 내서라도 리무진 택시를 먼저 샀어야 했어.”
‘현타’가 왔다. 가슴속에서 불붙지 못한 채 마른 장작처럼 방치했던 꿈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평생 인질처럼 살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길로 국회의사당 정문 앞으로 가 1인 노숙시위를 시작했다. 그의 손팻말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국민 여러분들께! 저는 9세 때 12세의 누나와 형제복지원에 끌려들어가 지옥과도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를 구해줄 아버지조차 86년에 잡혀오셨습니다. 25년이 흐른 지금 아버지와 누나는 20여년째 정신병원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내무부 훈령 410호로 인해 우리 가족은 한순간에 박살이 났습니다. 여기에 다 쓸 수 없어 여러분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검색창에 형제복지원 검색해보시면 주욱 나옵니다.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톰 크루즈의 자극, 불씨를 퍼뜨려라
‘2024 인권운동 최전선’ 다섯 번째는 한종선(49)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실종자·유가족)모임 대표의 전선이다.
만 8살이던 1984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누나와 함께 파출소에 맡겨졌다가 부산 최대의 부랑인 수용시설이었던 형제복지원으로 들어간 아이. 구타와 굶주림, 강제노역과 성폭행 등 각종 학대에 시달리다가 1987년 박인근 원장이 구속된 뒤 형제복지원을 나와 소년의 집과 서울 마리아 갱생원을 거쳐 1992년 사회에 던져진 아이. 그렇게 ‘살아남은 아이’(그가 2012년에 쓴 책 제목이기도 하다)가 12년 전 퍼트린 불씨는 거대한 불길이 되어 오늘도 타오른다.
1인 시위를 함께할 형제복지원 피해자 동지들이 국회 정문 앞으로 몰려왔고, 언론이 서서히 조명을 시작했으며, 검찰총장은 눈물로 피해자들에게 사과했다. 그와 동료 피해생존자 최승우가 주도한 과거사법 제정 투쟁이 열매를 맺어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출범했고, 지난해 12월부터는 사법부가 형제복지원에 대한 국가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리고 있다.
형제복지원 진실규명이라는 꿈을 위해 나선 지 벌써 12년. 한종선 대표가 있는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실종자·유가족) 모임 회원은 대략 620여명 정도로 늘었고, 지난해 12월엔 형제복지원 사건 손해배상소송 1심 결과도 나왔다. 현재 회원들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돕는 데 집중하고 있는 한 대표는 재판 결과에 대해 여러모로 씁쓸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아래는 한 대표와 서면·전화로 진행한 일문일답이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그러나 눈물겨운 응원
― 2012년 여름, 국회 앞에서 1인 시위할 때 분위기는 어땠나요?
“당시 대부분의 시민은 ‘아! 형제복지원, 알지! 그거 부랑인들 뭐 어쩌고 했던 사건 아냐? 이제 하다 하다 부랑인들도 국민 세금 축내려고 나오나 보네?’라며 이상한 눈초리로 수군수군하며 지나가곤 했습니다. 어떤 분은 멱살을 잡고 욕을 하고, 때론 얼굴에 침까지 맞아야 하는 수모도 겪었습니다. 그런데도 참아야 했어요. 그 사람과 실랑이라도 일어나게 되면 형제복지원 사건을 알리는 저의 진정성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부랑인의 시민 폭행이 되기 때문이죠.”
― 형제복지원 사건을 알려 나가면서 가장 힘이 날 때는 언제였나요?
“처음 노숙 1인시위를 하며 피해생존자들을 모아갈 때 거의 99%가 국가를 상대로 어떻게 이기냐 했었습니다. 힘겹게 뜨거운 여름과 겨울 몇해를 국회에서 각종 시위를 하며 버티던 때에 2018년 문무일 검찰총장이 형제복지원 사건의 피해자들 앞에서 눈물의 사과를 하고, 부산시장이 형제복지원 사건의 책임감을 통감한다며 저희 앞에서 사과의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비아냥도 들었지만, 형제복지원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시민분들의 응원과 도움으로 여기까지 올 때 가장 기뻤습니다.”
정신병원의 아버지와 누나를 찾으며
― 이 일에 나서길 잘했네요.
“2007년 구미의 한 정신병원에 있는 아버지와 누나를 찾으면서부터 형제복지원 사건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찾고 싶었던 가족이 형제복지원을 나와 평생을 정신병원에 갇혀서 사회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도 못하고 갇혀 있었던 거지요.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형제복지원에 있었기에 아버지와 누나의 입이 되어 이 사건을 알려야겠다고 다짐하고 행동으로 옮긴 거였지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고요. 한편으로는 이 일을 해오며 여러 상처를 겪고 그 상처들이 또 다른 트라우마가 된 지금으로써는 과연 잘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 어떤 상처일까요?
“형제복지원 사건을 알리고 재발을 막으려면 국민과 한목소리로 외치는 과정이 필요했기에 저는 법을 무시하면서 억울함을 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시민들이 불편과 혐오감으로 우리를 바라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더더욱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 사건을 알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개중에는 한강에서 뛰어내리면 해결된다, 분신이라도 해서 빨리 끝내야 거 하는 거 아니냐며 강경 대응을 요구하는 분들이 있었어요. 또 활동을 위해 후원금을 걷어야 한다는 식의 요구들을 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저는 이런 일들을 하지 않았어요. 억울함을 풀겠다며 또 다른 차별의 시선을 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지금껏 살아남았던 것처럼 앞으로도 살아가야 하잖아요. 그들 말처럼 그래서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시간만 낭비한 것이 아니냐는 자책감이 들지요.”
― 후원은 받을 수 있지 않나요?
“억울함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후원은 받고 싶지 않았어요. 생각보다 안 모이면 후원활동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것도 싫고요.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성을 잃을까 봐 두려웠어요. 주객전도가 될 것 같았습니다.”
‘1년 감금 기준 8천만원’에 대하여
― 국가상대 손해배상 소송 1심에서 승소했습니다
“다행히도 근 3년 만에 나온 1심 판결에서 재판부가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임을 재차 명시했어요. 불행일 수 있는 부분은 피해배상기준을 1년 감금 기준에 8천만원으로 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 사실을 기준으로 배상을 청구하는 것인데, 형제복지원에서 감금만 당한 것이 피해의 전부일 리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더하기 빼기 식의 기준은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대부분의 피해자는 형제복지원에 들어가면서 의무교육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사회에서 마땅한 일자리도 가질 수 없을뿐더러, 일자리를 구했다 하더라도 노동력 착취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형제복지원 안에서 했던 각종 강제노역을 통해 벌어들인 수입은 박인근 원장의 주머니로 들어갔고요. 인성이 망가지고, 매일 당한 구타와 폭력 때문에 장애를 가지고 사는 이가 있고, 평생을 정신병원에서 살아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2018년 검찰의 비상상고 판결문에서 나오듯, 신체의 자유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당한 형제복지원 사건의 피해자들은 진실화해위에서 철저하게 피해를 조사받아서 트라우마를 회복하고 명예를 되찾아야 합니다. 억만금을 주더라도 형제복지원에 들어가기 전의 온전한 모습으로 되돌릴 수 없기에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억만금은 못 준다 하더라도 피해 사실만큼은 재판부에서 정확하게 정의해 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현재 진행되는 손배소송에서 또 하나 우려스러운 부분은 국가 측이 재판부 결정에 불복하고 항소로 대응하고 있다는 겁니다. 상식적인 국가관과 사회관, 상식적인 용서와 화해가 이뤄지는 세상이 오기를 바랍니다. 진심으로 사과를 받아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진심으로 용서를 할 수 있을까요? 또 진심으로 용서를 받지 못한 가해자가 그 죄책감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을까요?”
부산 사는 피해자만 지원하는 부산시
― 부산시 같은 경우는 조례를 만들어서 여러 지원을 하는 것으로 아는데요. 아쉬운 게 많지요?
“부산시에서 조례를 통해 피해자에게 일시금 500만원과 한 달 생활지원금으로 20만원을 주는 것으로 압니다. 의료비 또한 500만원 한도에서 지원하고 있고요.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은 대부분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들입니다. 부산시에서 지원을 받는다 하더라도 수급비에서 그만큼 차감될 가능성이 큽니다. (편집자 주 : 경기도가 조례를 만든 선감학원의 경우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들이 월 20만원의 지원금을 수급비 차감 없이 온전하게 받을 수 있도록 경기도 의회와 경기도가 관련 조례를 개정했다). 의료비 지원 또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들은 1급 내지 2급으로 국가 차원에서 건강보험으로 지원을 받는 상태라서 수급자들은 지원을 받고 있는 건지 아닌지 체감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부산시가 정말로 책임 있는 지원을 하겠다면, 국가가 전국의 피해생존자들에게 차별 없이 지원할 수 있도록 설득해야 합니다. 형제복지원에 잡아 넣을 때에는 전국에 있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해놓고는 부산에 사는 사람들만 지원하는 것은 책임 회피일 뿐입니다.”
2기 진실화해위 직권조사 반드시 해야
― 2기 진실화해위는 한 대표님과 동료 피해생존자 최승우씨의 국회 고공농성 등 투쟁의 결과로 출범했습니다. 지금 2기 진실화해위는 잘하고 있나요?
“진실화해위에서 부랑인 시설 인권유린 사건에 대한 조사신청과 마감을 할 때 홍보가 부족하여 많은 피해생존자가 조사신청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직권조사를 해야 하는데, 하지 않고 있습니다. 1987년 당시 수용인들만 하더라도 4000여명에 가깝습니다. 진실화해위에 조사 신청을 한 사람들은 기껏 700~800여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게다가 1975년부터 12년간 운영한 기록만으로도 3만5000여명이 넘는 것으로 나오는데 너무 적은 사람들이 신청했어요.
남은 1년 진실화해위는 직권조사를 통해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푸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1년 안에 다 못하고 진실화해위가 문을 닫는다면 국회를 찾아 3기 진실화해위를 열 수 있도록 설득하고 관철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내 눈앞에서 두들겨 맞던 누나
― 형제복지원에 계실 때, 죽어도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있겠지요?
“1985년 27소대에 있을 때였습니다. 아침 기상을 하고 점호를 받고 운동장에서 군가를 부르며 구보(뜀뛰기)를 합니다. 아침 6시경 아침 식사 시간에 맞춰 운동장에서 4열 종대로 제 자리에 서서 우리 소대 차례가 올 때까지 기립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김없이 25소대에 있던 누나가 저에게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저의 손을 잡고 ‘선아 집에 가자’라며 끌고 가려 했습니다.
이미 이런 일들을 몇 차례 겪었고, 처음에는 누나 따라 움직였지만 조장들에게 잡혀서 밥도 먹지 못하고 엄청 두들겨 맞다 보니, 그날은 누나가 내 손을 잡고 집에 가자 해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누나는 우리 소대 조장에게 머리채를 잡히고 내가 보는 앞에서 넘어트려져서 발과 주먹, 손바닥으로 얼굴과 몸을 심하게 맞았습니다.”
― 어떻게 했나요? 말렸나요?
“처음에는 조장들에게 ‘누나 때리지 말라’고 하고, 누나는 ‘내 동생 때리지 말라’고 했었지만, 어느 순간 저는 누나가 조장들에게 두들겨 맞는 것을 보고 있음에도 말리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말리다 보면 내가 맞았고, 그런 나 때문에 전 소대원들이 식사 후 소대 내에서 단체기합이나 구타를 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누나를 짓밟던 조장은 나에게 자신이 하는 말을 따라 하라고 시켰습니다. ‘따라 해! 야 이 시발년아!’ ‘야 이 시발년아!’ ‘다시는 오지 마라!’ ‘다시는 오지 마라!’ 조장은 더 크게 외치라며 다시 시켰습니다. 그 후로 누나는 다시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날 내가 그 말을 따라 할 때 피투성이가 된 누나는 울면서 나와 조장을 쳐다보았습니다. 내가 살려고 누나를 버려야 하는 곳이 형제복지원이었습니다.
저는 한때 사람이었다가 형제복지원에서 짐승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짐승에서 사람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 과정이 너무나 힘이 듭니다.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생존자라는 이 ‘생존자’의 명칭을 감히 쓰게 된 이유는 그저 ‘형제복지원에서 살아나왔다’는 의미에서가 아닙니다.
형제복지원에서는 사람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기보다는 힘 있는(원장, 중대장, 소대장, 서무, 조장) 사람에게 알랑방귀를 뀌며 라면 수프라도 조금이라도 얻어먹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자신이 안 맞으려고 함께 탈출을 모의했던 사람들을 코 바르고(고자질하고), 인간이라면 할 수 없는 자신의 성욕을 다스리지 못해 자신보다 약한 상대를 성폭행하는 야만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이제는 그런 시대를 벗어나, 사람이라면 당연시 해야 하는 기본적인 예의와 존중을 배워가는 자세로 새롭게 살아간다는 뜻에서 생존자라는 명칭을 쓰게 된 것입니다.”
납치범에게 돈과 명예를 준 국가
― 형제복지원 원장은 악마였을까요. 아니면 왜 이렇게 사람들에게 몹쓸 짓을 했을까요?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악마가 있잖아요. 돈 때문이겠지요. 그렇게 했더니 국가에서 훈장까지 주니 명예는 자동으로 따라붙는 거죠. 돈과 명예 모든 것이 국가에서 나온 것이고, 원장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내무부 훈령 같은 것을 만들어서 길을 터주고, 사회정화사업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납치·감금을 정당화시켜준 것이 국가였던 셈이죠. 그렇기에 박인근 원장에게 책임을 묻는 건 아주 당연합니다. 그러나 더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 이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엄벌의 기준이 필요합니다.“
― 대표님은 인권운동가인요?
“저는 인권운동가가 아닙니다. 단지 내 억울함과 우리 가족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세상에 알리고 진상규명을 요구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당사자 권리 찾기를 위해 당사자 운동을 시작했을 뿐입니다. ‘피해자의 시선에서 피해회복은 무엇인가’,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 것인가’ 이런 과정이 누가 시켜서가 아닌 피해자로서의 당연한 요구여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많은 피해생존자가 모이고 대표로서 책임감은 막중할 수밖에 없었고요.”
― 형제복지원 피해자와 시민들께 꼭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600명이 넘는 피해생존자들은 저희 모임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풀고 다 함께 트라우마를 조금씩 극복해나가려고 노력하기에 또 하루를 버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고생 많으셨어요, 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앞으로는 건강 회복하고 트라우마도 극복하셔서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지시길 바랍니다. 시민 여러분들께는 저희를 어떠한 사건의 피해자로만 바라보지 마시고, 사람으로 이웃으로, 친구로 바라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웃처럼 때론 친구처럼 따끔하게 혼도 내주시고, 스스로 트라우마를 극복해나가며 여러분들과 잘 섞여 살아가는 모습을 본다면 웃어주시고 응원도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붕어빵 노점을 하다 손목을 긋다
한종선 대표는 2016년부터 광주에 산다. 형제복지원에 같이 입소했던, 나중에 정신병원에서 찾은 누나와 함께다. 기초생활 수급비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지난해 10월부터는 광주의 한 거리에서 붕어빵 장사를 시작했다.
요즘은 오후 1시에 나와 저녁 7시까지 영업을 한다. 그와 10여분간 핸드폰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네 차례나 손님을 받느라 통화가 중단됐다. “뭐로 드릴까요?” “두 마리에 천원입니다” “잘 들어가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같은 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정겹게 들려왔다.
1월3일에는 한 대표가 단속반의 노점 단속에 항의하다 붕어빵 반죽 포장을 자르던 가위로 손목을 그어 병원에서 봉합 수술을 받기도 했다. 가위의 날이 뼈까지 닿았다. 한종선 대표에게 붕어빵 노점은 포기할 수 없는 생계 전선이었다. 그래도 가위로 손목을 긋는 자해라니…. 형제복지원에서 겪었던 짐승의 시간의 재현이었다. “짐승에서 사람으로 돌아가기가 너무 힘이 든다”는 그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한종선 대표에게 마지막으로 다친 데는 괜찮냐고 물었다. 씩씩한 답이 돌아왔다. “손목 잘 붙어 있어요.”
고경태 기자 k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