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사법농단’ 재판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을 나서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른바 ‘사법농단’ 재판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을 나서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법농단’의 정점으로 지목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1심 판결문 3160쪽에는 핵심 피고인 ‘양승태’가 2702번 등장하는 동안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이름이 4507번 나온다. 혐의 대부분이 ‘직접적 실행행위자’는 임 전 차장이고 양 전 대법원장이 ‘공모’하는 구조였던 탓이다. 하지만 지난 2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1부(재판장 이종민)는 공모 관계를 모두 부인하며 양 전 대법원장과 고영한·박병대 전 대법관에 무죄를 선고했다. 5년간의 재판 끝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사법농단이 대법원장의 지시도 없이 법원행정처 ‘3인자’였던 임 전 차장의 단독행동으로 행해졌다는 결론에 이른 셈이다.

“양승태는 가담 안 해”…임종헌의 단독행동?

31일 한겨레가 양 전 대법원장 1심 판결문을 분석해보니, 법원은 47개에 이르는 혐의 대부분에서 사법행정권 남용을 부인했으며 9건 정도 행위의 위법성만 간접 인정했다. 오는 5일 1심 선고를 앞둔 임 전 차장이나 2심에서 징역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등이 주도한 불법행위가 일부 인정되더라도, 양 전 대법원장의 공모는 없다는 논리가 반복됐다.

법원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재상고심과 관련해 법원행정처가 청와대-외교부-김앤장법률사무소(일본 기업 쪽 대리)와의 협의 채널을 가동한 것과 양 전 대법원장이 김앤장 한상호 변호사와 3차례 사석에서 만나 사건 관련 대화를 나눈 사실은 인정했다. 당시 김앤장은 하급심에서 나온 피해자 승소 판결을 뒤집기 위해 외교부가 일본 기업에 유리한 의견서를 대법원에 제출하도록 하는 ‘법률 외적인 대응’ 전략을 펴고 있었다. 한 변호사가 전략을 재확인하며 진행 상황을 이야기하자 양 전 대법원장이 “잘 알겠다”거나 “잘 되겠지요”라며 이를 승인했다는 것이 검찰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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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재판부는 양 전 대법원장 답변이 “수동적으로 답하는 과정에서 나온 언급”일 뿐이라고 판단했다. 양 전 대법원장이 강제동원 사건의 주심이었던 김용덕 전 대법관에게 ‘대법원 (피해자 승소) 판결이 국제법적으로 문제가 될 것 같다’고 말한 사실도 인정했지만 재판권은 침해하지 않았다고 봤다. 법원은 임 전 차장이 주도적으로 청와대, 외교부, 김앤장과 수시로 연락하며 협의한 사실과 일부 공무상 비밀누설 행위의 위법성도 인정했지만, 이 역시 양 전 대법원장이 ‘지시’했다는 증거가 없어 무죄라고 판단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재판에 넘겨진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 11월27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결심 공판에 출석하며 취재진이 질문하자 손을 들어 올리고 있다. 연합뉴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재판에 넘겨진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 11월27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결심 공판에 출석하며 취재진이 질문하자 손을 들어 올리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판단은 반복된다. 재판부는 임 전 차장이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사건에서 청와대 요청에 따라 고용노동부의 재항고이유서 작성 지원을 지시한 사실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와해를 위한 대응방안 검토를 지시한 사실 등의 위법성을 인정했다. 검찰은 이러한 행위가 “대법원장의 정책 결정 없이 도저히 임종헌이 독단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고 주장했지만, 양 전 대법원장의 공모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번번이 부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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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행정 비판에 인사 불이익 줘도 ‘적법’?

양 전 대법원장이 ‘직접’ 실행한 법관 인사 불이익 혐의도 무죄가 나왔다. 법원행정처가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판사들을 ‘물의야기 법관’으로 지목해 보고서를 작성하고, 양 전 대법원장이 직접 ‘체크(V)’ 표시로 인사 불이익 조처를 결재했다는 혐의다. 초유의 사법농단의 배경으로 대법원장의 막강한 ‘인사권’이 지목되어 왔지만, 법원은 이를 “적법한 사법행정권의 행사”라고 본 것이다.

해당 보고서에는 내부 게시판에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글을 올렸다거나 한겨레와의 인터뷰에 응한 것으로 추측된다는 등의 내용이 담겼는데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해당 판사를 일일이 거론하며 물의야기 사유가 적절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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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 블랙리스트’로 불렸던 물의야기 보고서는 사법농단이 법원 밖으로 알려지는 사건의 발단이었지만, 법원은 보고서 작성 자체도 위법하지 않다고 봤다. 재판부는 “물의야기 보고서는 매년 구체적인 지시 없이도 작성해 결재를 받아 왔던 문건 중 하나로 이용훈 대법원장 시절에도 존재가 확인된다”며 “인사권자를 위한 판단의 보조자료”라고 밝혔다.

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