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조치원소방서에 놓여 있는 화재진압복.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세종 조치원소방서에 놓여 있는 화재진압복.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소방관 ㄱ씨가 방광암이 자신의 공무와 관련 있다는 판정을 받는 데까지는 꼬박 3년이 걸렸다. 1993년 임용돼 화재진압대원과 차량 운전원으로 일한 ㄱ씨는 2015년 방광암 진단을 받고 2017년 공무상 요양(공상)을 신청했다. 하지만 이듬해 인사혁신처 산하 공무원연금급여심의회(현 공무원재해보상심의회, 이하 심의회)는 공무상 과로와 방광암의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명백한 상관관계’가 없고 ‘체질적 요인’이 복합적인데다 과도한 업무가 지속됐다고 해서 이를 질병과 관련지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ㄱ씨는 이 판정에 불복해 재심을 신청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ㄱ씨의 다음 선택은 소송이었다. 서울행정법원은 2020년 8월 심의회와 다른 판단을 했다. 법원은 △방광암 환자의 20~25%가량이 직업적 영향일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 △화재 현장에서 탄화수소(PAH), 벤조피렌, 테트라클로로에틸렌(PCE), 트리클로로에틸렌(TCE), 벤젠, 포름알데히드 등 유해물질에 노출된 사실 △주요 업무가 화재진압이었던 경력(5년5개월)이 짧은 편이라고 해도 운전원 등 다른 직무에서도 10년 이상 화재 현장에 출동했던 점 △배기가스에도 노출된 점 △소방관의 방광암 연령별 표준 발생률이 일반인보다 높다는 연구 △과거 관련 병력이 없는 점 등의 근거를 종합해 ㄱ씨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특히 법원은 ㄱ씨의 공상 인정을 위해 질병과 업무의 인과를 ‘의학적·과학적’으로 입증한 게 아니라 ‘규범적 관점’(사회적 기준)을 적용해 판단했다고 판시했다.

공무원이 다치거나 아프면 인사혁신처에 공상을 신청한다. 이후 심의회에서 승인 여부를 판정하는데, 이에 불복하면 재심을 거쳐 소송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ㄱ씨의 사례처럼 심의회의 공상 판정이 소송을 거쳐 뒤집히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겨레가 인사혁신처에 확인한 결과, 최근 5년 동안 종결된 심의회의 공상 불승인 취소 소송 38건 가운데 소방관이 승소한 사건이 8건(일부 승소 1건 포함)이었다. 법원이 5건 가운데 1건 이상(21.1%)에서 심의회의 불승인 판정을 뒤집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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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의 판단 근거는 뭘까. 한겨레가 최근 5년 동안 소방공무원의 공상 불승인 사건에서 소방관이 승소한 1심 판결문 9건(일부 승소 1건 포함)을 살펴본 결과, 법원은 두가지 공통 근거로 심의회의 결정을 뒤집었다. 살펴본 사건은 모두 질병으로 인한 공상 불승인 사건인데, 근골격계 질환 4건, 암 1건, 신경계 질환 1건, 난청 2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1건 등이었다.

공통 근거 가운데 하나는 소송 과정에서 진료 기록 등의 감정을 맡은 전문의가 질병과 업무의 연관성을 두고 “가능성이 있다”거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판단한 점이다. 다른 하나는 ㄱ씨의 사례처럼 의학적 입증이 완벽하지 않아도 폭넓은 사회적 규범에 따라 공상을 인정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을 인용한 점이다. 소방관 공상 불승인 사건에서 2건을 승소한 박호균 법무법인 히포크라테스 대표(의사 출신 변호사)는 “심의회에서 내는 의료인들의 의견은 의학이나 과학적 근거에 기반해 이뤄진다”며 “반면 재판에서는 인과관계의 경우 사회적으로 받아들일만한 기준이 등장한다. 이 과정에서 판단이 바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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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좁은 범위의 의학적 입증 가능성에 근거해 공상 승인 여부를 판정하는 심의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재 심의회에선 전문의, 법조인, 관료 등이 심사하지만, 결국 의학적 판단에 많은 부분을 의존한다. 이 구조에서 발병 원인이 알려지지 않은 희귀 질환은 불승인 판정이 나는 경우가 많다.

16년차 소방관 ㄴ씨 사례가 대표적이다. ㄴ씨는 119상황실에서 일하던 2018년 1월 희귀 말초신경병증인 ‘밀러-피셔 증후군’과 안면 근육 일부를 제어하기 힘든 ‘벨 마비’ 증상 진단을 받았다. 물체 하나가 둘로 보이고 보행 장애도 생겼다. ㄴ씨는 2017년 12월 충북 제천에서 발생한 스포츠센터 화재 참사 등을 겪으며 한달 동안 200시간 넘는 격무에 시달렸다. 하지만 심의회는 발병 원인이 의학적으로 뚜렷하지 않아 근무와 연관성을 찾기 어렵다며 공상을 불승인했다. 반면 법원은 스트레스와 교대근무 등이 발병에 영향을 줬을 수도 있다고 보고 의학적 입증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상을 불승인해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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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의회가 불승인 근거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상황도 소방관을 힘겹게 한다. 법무법인 감천의 이영만 노무사는 “근로복지공단이 판단하는 산재는 구체적 판단 기준을 가진 반면 공무원 공상은 구체적 기준을 알기 어려워서 신청하는 입장에선 답답하다”고 말했다.

인사혁신처는 이에 대해 “심사 과정에서 그동안의 법원의 결정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향후 심사 사례가 축적되거나 국제암연구소 등에서 해당 암 발생에 충분한 근거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면 이를 반영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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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용 기자 juney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