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계성·양재연 장로 등 수많은 순교자를 낳았다. 사진은 1938년 9월 신사참배를 결의한 홍택기 목사(앞줄 가운데)를 비롯한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총회 임원들.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방계성·양재연 장로 등 수많은 순교자를 낳았다. 사진은 1938년 9월 신사참배를 결의한 홍택기 목사(앞줄 가운데)를 비롯한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총회 임원들.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오재식이 산정현교회에서 보수적인 신앙교육을 받은 것은 1945년 광복 직후부터 47년 월남 때까지 2년 남짓이었지만, 그때 받은 교육은 평생 그의 정신 속에 남아 영향을 끼쳤다. 그는 훗날 진보적 신학자 김재준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강원용 목사의 제자가 된다. 그리고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등을 펼쳐 나갔다. 하지만 그는 개신교 안에서도 가장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고신파인 산정현교회에서 받은 신앙교육과 진보 신학, 더 나아가 교회일치(에큐메니컬) 운동이 자신의 내면에서 한 번도 충돌하지 않았음을 여러 번 밝혔다. 신앙뿐만 아니라 어떠한 일을 하는 데서도 이들 신앙적 모습은 필요할 때마다 재식에게 도움을 주는 기반이었다. 생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고신파인 산정현교회의 주일교육과 세례를 받은 진보적 신앙의 경동교회는 제 안에서 아무런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어요. 숙명여대의 이만열 명예교수나 서울대 손봉호 명예교수도 고신파에 속해요. 그렇지만 이 교수나 손 교수를 보고 ‘고신파다’ 안 하잖아요. 신앙이 깊어지면 그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아요. 고신파의 이데올로기는 개인 신앙을 강조하지요. 사회문제는 교회가 할 일이 아니다, 믿음이 좋아야 천당 간다, 이렇게 가르친 거죠. 경동교회를 비롯한 진보적 교회 신앙에서는 네가 혼자 천당에 가면 뭐하냐. 다 같이 가야지. 그러려면 사회에 나가서 사회 선교를 해라, 하면서 옆으로 나가는 거죠. 이러한 갈래인데, 그 둘이 왜 충돌하느냐,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래서인지 적어도 제 안에서는 그 양쪽의 신앙으로 인해 충돌이 생기지 않았어요. 전 ‘하나님의 뜻이다’ 이런 말을 잘 안 쓰려고 합니다만, 내 인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결정을 할 때면 산정현교회 주일학교 교육을 받았던 때처럼 ‘이건 하나님의 뜻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온다고요.”

재식이 산정현교회를 통해 맺은 인연은 여럿이다. 그 가운데 그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친 사람은 양우석씨였다. 그는 산정현교회 양재연 장로의 아들이었는데, 그의 집은 당시에도 목장을 운영할 정도였으니 꽤 부자였다. 양재연 장로는 사업 수완도 좋았지만 신앙심 또한 투철한 사람이었다. 평양노회에서 파송된 전권위원들이 산정현교회를 접수하러 왔을 때도 당시 청년부 소속 집사였던 그가 가장 앞장서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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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현교회 교인들은 37년 중일전쟁 발발과 더불어 거세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주기철 목사에 대한 신뢰와 민족적 신앙적 사명으로 놀라운 합심과 결단을 보여주었다. 주 목사가 부임한 뒤 교회는 날로 단합된 부흥을 이루었고, 그 결과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했을 때 주 목사는 이런 말로 교회의 신성권을 선언하며 교인들에게 당부하기도 했다.

“이 교회는 일본 우상에게 절대로 절대로 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교회당 안에는 다른 어떠한 간판도 달지 못하며 못 자국 하나도 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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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목사의 간절한 당부 덕분이었을까. 일제가 평양노회를 동원해 산정현교회 현관문에 횡십자로 나무판을 못박아 폐쇄한 뒤에도 교인들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교인들은 몰래 연락을 주고받으며 낮에는 채정민 목사의 집에, 밤에는 이인재 전도사의 집에 모여 예배를 지속했다. 그때마다 일제는 귀신같이 알아내 훼방을 부리며 단속을 했다. 산정현교회라면 작은 소모임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럴 때 양 장로는 자신의 목장 한구석을 예배 장소로 제공하고 함께 예배를 드렸다. 일제로부터 견제가 들어올 것을 알면서도 교인들의 단합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이었다.

고 오재식 선생
고 오재식 선생

양우석씨는 일찍이 서울로 유학을 가서 경기중학교에 다녔는데 방학 때면 평양으로 돌아와 매일 산정현교회를 나왔다. 그는 재식을 특별히 아껴주었다. 훗날 월남한 재식을 기독학생운동으로 처음 이끈 사람도 바로 그였다. 또 재식에게 서울대 종교학과를 권유한 사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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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식이 대학에서 기독학생회 운동을 할 때 앞에서 가야 할 길을 일러준 사람도 그였으며, 다른 학생회와 다툼이 벌어질 때마다 나서준 든든한 후원자였다.

양씨의 부인인 김명숙씨와 재식의 부인 노옥신씨가 친구인 덕분에 더욱 각별해진 그들의 인연은 평생을 두고 계속되었다.

오재식 구술

구술 정리/이영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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