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갈 데 없고 기댈 곳 없는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의 주민들은 2년여 전부터 마을은행 격인 공제협동조합을 만들어 급전을 융통해 ‘서로가 서로를 돕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들이 쌓은 출자금 등 ‘협동’을 법으로 보호하는 일에 무심하다.
“서울시와 쪽방상담소는 집주인하고만 이야기했습니다. 쪽방 주민들을 위한 사업을 한다면서 어떻게 정작 당사자인 세입자들을 쫓아낼 수 있습니까.”
지난 12일 오전 서울 중구 세종대로 서울시청 앞. 서울의 대표적 쪽방촌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 주민들과 이들을 돕는 인권단체 관계자 30여명이 모여 기자회견을 열었다. 서울시가 쪽방촌 주민들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겠다며 벌인 일이 되레 주민들에게 해가 됐다는 주장이었다.
1000여명이 사는 동자동 쪽방촌은 창문도 없는 1평 남짓한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단열이 안 되는 오래된 건물들이라 겨울에 춥고 여름엔 덥다. 요즘처럼 폭염이 기승을 부릴 때는 쪽방촌 안 온도가 35도를 넘는다. 동자동 쪽방촌 건물 두 곳의 세입자 34명은 지난 6월 초 집주인으로부터 느닷없이 ‘보름 안에 방을 비우라’는 통보를 받았다. 쪽방촌 환경 개선 사업을 벌이는 서울시의 도움을 받아 쪽방을 수리해 임대료를 낮춰 다시 입주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진 돈이 없어 이사비 마련조차 쉽지 않은 이들에게 당장 15일 안에 옮겨갈 다른 방을 구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실제 건물 수리가 끝난 뒤 원래 살던 건물로 돌아간 이는 6명에 불과했다. 갑자기 길에 나앉게 된 한 주민은 노숙을 하다 취객에게 맞아 전치 4주의 부상을 당했고, 또다른 주민은 길에 뒀던 세간을 모두 도둑맞았다.
전국 쪽방촌 주민들은 대개 기초생활수급자들이다. 쪽방촌 주민 가운데 동자동 사람들처럼 행정기관에 자기 목소리를 당당히 내는 이는 드물다. 기초생활수급 자격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자활근로 일자리가 끊기는 건 아닐까 불안한 마음에 눈치를 보고 위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자동 쪽방촌 주민들은 이주대책 없는 서울시 쪽방촌 환경 개선 사업을 적극 비판한다. 이곳 주민들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자동 쪽방촌엔 주민 자주 조직인 동자동사랑방(대표 김창현)과 동자동사랑방마을공제협동조합(이사장 이태헌)이 있다. 사랑방은 2008년, 공제협동조합은 2011년 결성됐다. 사랑방이 쪽방촌 소식지 <쪽방신문>을 만들고 인권상담을 하고 주민을 위한 문화사업을 펼친다면, 공제협동조합은 제도권 금융기관 대출이 불가능한 이곳 주민들이 직접 조합원으로 출자하고 운영하는 일종의 마을은행이다.
2011년 3월 공제협동조합 결성 뒤 지난 6월까지 6564만원의 출자금을 쌓고 6886만원(누적치)을 대출했다. 동자동 쪽방촌 주민 1000여명 중 352명이 공제협동조합의 조합원이다. 대개 한 사람당 한 달에 5000원에서 1만원 정도를 출자한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협동과 신뢰에 기초해 스스로 은행을 만든 것이다. 그렇게 모은 돈은 단돈 몇십만원이 없어 방에서 쫓겨나 거리로 나앉거나, 병원비가 없어 아파도 참고 지내는 이들에게 급전으로 융통된다.
동자동에 깃들인 지 33년이 된 이원재(가명·55)씨는 “나는 공제협동조합에 가입할 때 신용불량자였다. 공제협동조합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이거다’ 싶었다. 소액이지만 지금까지 모두 8번 대출받았다. 주로 식료품값을 빌렸지만 이젠 돈을 빌리고 모아 임대주택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주민 1000명 중 352명이 조합 출자 매달 5천∼1만원 내 6564만원 쌓아 생활자금·병원비 등 급전으로 대출 주민이 설립부터 운영 모두 주도 취업정보 알려주고 마을잔치 열어 의료생협·생활조합 설립도 준비 환경정비사업에 헐릴 위기 아직 구체적 이주대책 없어 “이주특별법 마련 촉구할 것”연이율 2%에 최대 50만원까지 빌릴 수 있으며, 상환액은 한 달에 5만원을 넘지 않는다. 그나마도 갚지 못하는 이들은 월 상환액을 줄이고 기간을 늘려 배려한다. 조합에서 한 번 제명되면 다시 가입해 돈을 빌릴 수 있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리는 구조로 설계했다. 상환율은 지난 6월 기준으로 70.8%로 지난 5월 말 국내 은행 가계대출 연체율 1.04%와 단순 비교하면 매우 낮은 수준이다. 하지만 한 달에 45만원 남짓한 기초생활수급비를 받아 20만원은 월세로 내고 25만원으로 한 달을 버텨야 하는 이들의 처지에서 이 정도 상환율도 쉽지 않다. 16일 동자동사랑방마을공제협동조합 사무실에서 만난 이태헌(57) 이사장은 “연체를 해도 아직까지 상환 자체를 포기한 이는 없었다”고 말했다.
젊은 시절 양복재단 일을 했다는 이 이사장도 10여년 전 동자동에 정착한 기초생활수급자다. 그는 2010년께 한국주민운동정보교육원이란 민간단체의 교육을 받고 와 이웃들에게 공제협동조합 설립을 제안했다. “갑자기 아프면 병원비 제대로 낼 수 있는 사람이 이 중에 있느냐”는 그의 설득에 반신반의하던 이웃 주민들이 하나둘 함께하기 시작했고 오해·반대 등의 곡절 끝에 공제협동조합이 설립돼 여기까지 성장해왔다. 2007년부터 동자동에 산다는 김태식(가명·61)씨는 “언젠가 목돈 쓸 때 도움이 될 것으로 믿고 공제협동조합에 돈을 넣어둔다”고 말했다.
동자동사랑방마을공제협동조합은 조합원들을 위한 급전대출이 주사업이지만, 다른 일도 한다. 조합원들에게 각종 취업정보를 알려주거나 가족 없이 죽은 이들의 장례를 치러준다. 겨울엔 조합원 중 원하는 이들에게 군고구마나 붕어빵 장사 등을 할 수 있게 포장마차를 빌려주고, 명절 때 마을잔치를 연다. 이런 다양한 활동은 출자금에서 발생하는 이자를 이용한다. 조합 사무실 임대료와 인건비 등 운영비는 외부 후원으로 충당한다.
동자동사랑방마을공제협동조합 말고도 전국에는 75곳에 기초생활수급자 등이 만든 자활공제협동조합이 있다. 대부분 자활공제협동조합들은 보건복지부가 지정한 자활지원센터가 세운 ‘반관 단체’다.
동자동이 특별한 것은 드물게 주민들이 직접 설립을 주도해 자주적으로 꾸려간다는 점이다. 이 이사장은 “서울시나 정부에서 지원을 받기 시작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진다. 얼마 전 서울시 쪽방 수리사업이 의도와 달리 문제를 일으켜도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시가 지금껏 받아왔던 지원금을 다 물어내라 하면 어쩔 건가”라고 되물었다.
동자동사랑방마을공제협동조합은 현재 다양한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조합원들이 질 좋은 의료 서비스와 생필품을 값싸게 구입하도록 의료생활협동조합이나 생활협동조합을 만드는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 동자동 쪽방촌 내 빈 건물을 매입해 임대료를 낮춘, 깨끗한 환경의 쪽방을 공급하는 일도 논의중이다. 소액대출과 상호부조를 통해 쌓은 주민들 간의 신뢰가 더 집단적이고 자주적인 독립과 자립의 의지를 키우는 것이다.
동자동 쪽방촌은 현재 도시환경정비사업 대상지로 묶여 있다. 수년 안에 쪽방 건물들이 헐리고 고층건물과 상가가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쪽방촌 주민들은 아직까지 별다른 이주 대책을 들어보지 못했다. 이 이사장은 “내년쯤 공개 토론회를 열어 주민 이주를 위한 특별법 마련을 촉구할 생각이다. 먼저 우리끼리 함께 힘줘가며 일어서야 밖에서도 우리를 인정한다”고 말했다.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법의 보호 못받는 자활공제협동조합작년 시행 협동조합기본법 소액대출 등 금융업 금지 출자금 보호장치도 없어
동자동사랑방마을공제협동조합을 비롯한 전국 75곳의 자활공제협동조합은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 등 저소득층에게 급전을 융통해 주는 비상 돈줄 구실을 하고 있다.
하지만 자활공제협동조합들은 법적 보호를 못 받는 임의단체다. 지난해 12월 발효된 협동조합기본법이 소액대출이나 상호부조 같은 금융업을 협동조합이 할 수 없는 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협동조합기본법 제정 과정에서 대부업체들이 난립할 수 있다며 금융위원회가 손사래를 쳤기 때문이다. 이 결과 일반 협동조합의 금융업은 아예 불가능해졌고, 사회적 협동조합에는 제한적으로 허용됐다.
자활공제협동조합이 사회적 협동조합이 되면 소액대출이나 상호부조 같은 금융업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전체 사업량의 40% 이상이어야 하는 ‘주 사업’으로는 못 한다. 자활공제협동조합들의 주요 사업은 급전이 필요한 조합원들에게 소액대출을 하는 일이다. 이 때문에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갈 수도 없다.
자활공제협동조합들은 협동조합기본법 발효 이전부터 협동조합 방식으로 조직을 꾸려왔고, 조합당 평균 6000만원에 가까운 출자금을 쌓아뒀지만 관련 법의 보호를 못 받고 있다. 금전 사고가 나더라도 출자금 보호 장치가 약하다 보니 자활공제협동조합은 안전성 측면에서 보자면 ‘계’ 수준이다.
기획재정부가 다음달 정기국회에 제출하려고 입법예고한 협동조합기본법 개정안에는 사회적 협동조합이 주 사업과 별도로 할 수 있는 소액대출의 범위를 ‘출자금의 3분의 2까지’에서 100%로 늘렸을 뿐이다. 자활공제협동조합이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인가받지 못하면 2년 뒤부턴 아예 협동조합이란 이름도 쓰지 못한다.
자활공제협동조합 쪽에선 소액대출과 상호부조를 주 사업으로 하는 사회적 협동조합을 자유롭게 설립할 수 있도록 하라고 주장한다.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인가를 받겠다는 곳도 일부 있지만 절반가량은 지금처럼 임의단체로 남겠다는 쪽이다. 동자동사랑방마을공제협동조합도 ‘주민자조회’로 남기로 했다.
이병학 자활공제협동조합연합회 상임이사는 “자활공제협동조합은 처음엔 수급자들을 위한 자활 사업에서 시작했지만 점차 해당 지역의 노동 빈곤층까지 포괄해 조직을 확장해가고 있다. 자활공제협동조합의 법적 보호 장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기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