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와서 한센병 환자 집단거주촌인 성심원에서 봉사한 지 36년이 된 스페인 출신의 유의배 신부가 성심원 뜰의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국에 와서 한센병 환자 집단거주촌인 성심원에서 봉사한 지 36년이 된 스페인 출신의 유의배 신부가 성심원 뜰의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맨발이다. 사시사철 한 번도 양말을 신지 않는다. 샌달에 담겨 있는 발은 강인해 보인다. 인간을 땅에 연결하는 발은 수고롭다. 그래서 인간들은 추위에 발을 보호하기 위해 천으로 감싼다. 그는 그런 양말을 거부한다. 겨울의 찬 바람을 그대로 수용한다. 인생의 추위도 그에겐 없다. 추우면 추운 대로 산다. 삶의 무게가 그에겐 가볍기만 하다. 한없이 가벼운 그는 타인이 짊어지고 가는 인생의 무거움도 함께 나눈다.

그의 주변에 있는 타인은 일반인들은 상상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산다. ‘천형’의 질병으로 알려진 한센병을 앓은 이들이다. 누구도 함께하거나, 보려고도 하지 않는 이들을 그는 자신의 몸처럼 사랑한다. 자신의 유전자에 조금의 섞임도 없는 한국인 한센병 환자들을 친형제자매처럼 아끼고 돌보았다. 벌써 36년째다. 고통의 삶을 마친 한센병 환우를 직접 천국에 보낸다. 숨이 끊긴, 일그러지고 문드러진 지체를 정성들여 닦고 새 옷을 입힌다. 이승의 힘든 삶을 마친 그들은 그의 손에 의해 천국에 가는 준비를 한다. 수의를 입히기 위해 굳은 팔을 억지로 편다. “형제여, 이제 긴장을 푸시게. 그래야 내가 이 옷을 입히지.”

나치 무차별 폭격으로 3천명 학살바스크지방 게르니카서 태어나전쟁 겪은 한국 선교사 자원 한 환자 유언 따라 아버지도 되고마지막 가는 길 150명 손수 염낙인·편견·차별, 사랑으로 보듬어한 가지 걱정은 혹시 치매 걸려…내일은 하느님 몫, 오늘만 성실하게2평 남짓 방에서 무소유로 산다

강제 불임수술 안 해 한때 500명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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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여명의 한센인들이 마지막 길을 그에게 맡겼다. 그 가운데 150명은 그가 직접 염을 했다. 누구도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살아 있을 땐 보지 못했던 몸의 상처들과 말라서 뼈밖에 없는 몸을 보면 십자가 위에서 고난받은 예수님의 몸이 바로 이 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더 기쁜 마음으로 해요.” 아직도 한센인 140여명이 그와 삶을 같이한다. 중증장애인 10여명도 그의 친구들이다.

유의배 신부는 사시사철 맨발로 산다. 그의 검은 수도복 허리춤에는 청빈·순결·순명을 상징하는 세 개의 매듭이 묶인 ‘성 프란치스코’의 허리띠가 둘려 있다.
유의배 신부는 사시사철 맨발로 산다. 그의 검은 수도복 허리춤에는 청빈·순결·순명을 상징하는 세 개의 매듭이 묶인 ‘성 프란치스코’의 허리띠가 둘려 있다.

경남 산청의 지리산 자락은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이 자주 출몰했던 지역이다. 전쟁이 끝나고 한센병 환자 20여명이 전국을 헤매다가 정착한 곳이 지금의 한센병 환자 집단거주촌인 성심원이다. 이들은 경호강을 건넌 뒤 자신이 타고 온 배를 강물에 떠나보냈다. 강 건너에 사는 주민들이 자신들을 보고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할까봐 낮에는 산속에서 지내다가 밤에만 이곳에 내려와 잤다고 한다. 소록도 집단 거주지와는 달리 이곳 성심원은 한센병 환자들에 대해 강제 불임수술을 하지 않아 한때 500명까지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생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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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의배(70·루이스 마리아 우리베) 신부가 한국에 온 것은 1976년이다. 서른살의 스페인 출신 젊은 신부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아이고, 하느님. 이곳이 정녕 한국이란 말입니까?”라고 탄식했다. 자신이 알고 있던 한국은 전쟁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헐벗은 나라였는데, 그래서 봉사의 삶을 살려고 자신의 고향에서 1만㎞ 떨어진 한국에 지원해서 왔는데, 서울은 마치 뉴욕과 같이 건물이 많았고, 사람들도 활기찼다.

어머니에게서 전쟁 참상 자주 들어

그의 고향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 1937년 스페인 내란 중 파시스트 프랑코를 지원하는 독일의 무차별 폭격으로 고향에 살던 7천여명 가운데 3천여명이 학살당했다. 나치는 마을 전체에 자동소총 1정밖에 없던 게르니카를 독일이 새로 개발한 폭격기와 폭탄의 성능을 실험하기 위해 폭격을 했다. 파블로 피카소는 <게르니카>라는 그림으로 나치의 잔혹상을 세계에 고발했다. 빵을 만들어 파는 부모님의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신부인 작은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신부를 꿈꾸었다. 게르니카 폭격 현장에서 살아남은 그의 어머니는 어린 그에게 전쟁의 참상을 자주 이야기해주었다. 16살 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들어가 바스크 지방 아란차수신학대학을 졸업하면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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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의 해발 4천m 티티카카 호수 근처의 가난한 마을에서 2년간 선교활동을 마치고 한국에 온 그는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안에 있는 명도원에서 2년 동안 한국어를 배운 뒤 경남 진주와 강원도 강릉, 주문진, 제주도에서 2년 반을 보냈다. 그리고 1980년 성심원으로 부임했다. 비로소 자신이 꿈꾸던 어려운 이들과의 삶을 시작한 것이다. “신부가 되고 선교사로서 어느 나라로 가고 싶은지 물었을 때, 한국으로 가고 싶다고 했어요. 그때는 8명의 프란치스코회 신부님들이 한국에 와 있는 상태였어요. 내가 어렸을 때 전쟁이 났던 나라인 한국에서 봉사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한 거죠.”

유 신부보다 6살이 많은, 한센병에 췌장암까지 앓던 한 환자는 매일 자신을 간호하러 오는 유 신부에게 “두 아이의 아버지가 돼달라”는 유언을 남기며 피를 토하고 숨졌다. 그의 자녀들은 실제 유 신부를 아빠라고 불렀다.

위암에 시달리던 한 할아버지 한센병 환자는 성심원의 독신 마을에 살며 매일 자신을 찾아오는 유 신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사실은 제가 위로받으러 간 셈입니다. 항상 그 할아버지는 부드러운 어조로 타향에서 사는 저를 달래주곤 했어요. 그 할아버지가 숨을 거두실 때 정말 슬펐어요.”

그에게도 죽음은 슬픈 이별이다. 누구보다도 자신을 따르던 예쁜 소녀는 어느 날 유치원에서 오던 길에 트럭에 치여 숨졌다. 매일 신부가 유치원에서 데려오던 소녀였는데 그날 그가 일이 있어 데리러 못 간 사이 교통사고가 난 것이다. 부모가 한센병 환자이기에 신부가 부모 역할을 대신했었다. “하느님은 왜 그런 죄없는 어린 소녀를 일찍 데려간 것이죠? 하느님이 실제 계신 건가요?” 신부는 이렇게 대답한다. “하느님은 그 소녀가 살아가면서 겪어야 할 힘든 일을 덜어주기 위해 일찍 데려간 것입니다. 하느님도 우셨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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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빈·순결·순명 상징 허리띠 반들반들

성심원은 ‘한센’이라는 주홍글씨가 준 낙인과 세상 사람들의 편견과 차별, 아픔들을 간직한 채 한센인들이 스스로의 손과 발로 삶의 자리를 가꾸어왔다. 한센인 가족이 사는 가정사 4개 동과 독신으로 사는 한센인들이 사는 독신사 1개 동, 3층짜리 전문 요양원과 대성당, 수도원과 수녀원 등 비교적 큰 집단 거주지이다. 한 해 운영비 20억원의 70%는 국고로, 나머지 30%는 기부금 등으로 운영된다.

유 신부는 매일 새벽 대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온종일 한센인들과 시간을 보낸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한센병을 앓았던 사람들일 뿐이지 지금 한센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전염 가능성은 없어요. 일반인이 질병이나 장애를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그에겐 한 가지 걱정이 있다. 혹시 더 나이가 먹고 자신이 치매에 걸리면 주변 사람들이 힘들지 모른다는 걱정이다. “많은 치매환자들이 병이 깊어지면 어릴 때의 이야기를 많이 해요. 저의 병이 깊어지면 한국말이 아닌 스페인말을 해서 간병인들이 못 알아듣고 고생할까봐서요. 괜한 걱정일까요?”

그는 어떤 삶의 계획도 없이 산다고 한다. “오직 오늘만 생각해요. 미래에 대한 계획은 하느님의 몫이죠. 나에게 주어진 오늘, 성실하게 살면 됩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에 따라 철저히 ‘무소유’로 산다. 2평 남짓한 방에는 ‘살아 있는 동안 가난한 사람을 사랑한 사람은 죽을 때 두려움이 없다’는 글귀가 붙어 있다.

사철 한결같이 입는 검은 수도복의 허리춤에는 청빈, 순결, 순명을 상징하는 세 개의 매듭이 묶인 ‘성 프란치스코’의 허리띠가 둘러 있다. 매듭은 반들반들하다. 그의 손때가 묻어서다. 흰 수염에 한없이 선한 그의 눈길이 푸른 하늘보다 더 눈부시다.

산청/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