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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배 “‘사람이란 누구인가’ 질문 다시 던져야 할 때다”

등록 :2015-01-09 18:56수정 :2015-12-22 15:06

새해를 맞은 이틀날인 지난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북촌의 한 카페에서 언론인 김중배(81) 언론광장 대표를 만났다. 그는 이왕 만난 김에 근처인 헌법재판소에 가보자고 했다. 헌재 앞뜰에 앉아 그는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최후변론 때 이곳에 있었다”며 지난해 11월25일 18차 공개변론에 참석했다고 전했다. 1959년 진보당 조봉암 당수의 사형을 취재한 그는 “내가 냉동인간이 돼서 50년 만에 깨어난 모양”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새해를 맞은 이틀날인 지난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북촌의 한 카페에서 언론인 김중배(81) 언론광장 대표를 만났다. 그는 이왕 만난 김에 근처인 헌법재판소에 가보자고 했다. 헌재 앞뜰에 앉아 그는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최후변론 때 이곳에 있었다”며 지난해 11월25일 18차 공개변론에 참석했다고 전했다. 1959년 진보당 조봉암 당수의 사형을 취재한 그는 “내가 냉동인간이 돼서 50년 만에 깨어난 모양”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 언론인 김중배
▶ 이진순 언론학 박사. 전직 교수. 살림하고 애 키우는 오십대 아줌마이자 공부하고 글 쓰는 열혈시민이다. 서울대 사회학과와 럿거스대 커뮤니케이션스쿨을 졸업했다. 미국 올드도미니언대학 조교수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을 강의했고 그 전에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 다큐멘터리 작가로 다양한 인물을 취재했다. 세상의 새 지평을 여는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김.중.배. 그 이름 석 자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아온 이들에게 하나의 추상명사다. “명리(名利)에 물들지 않고 한결같은 엄정함으로 시대를 기록하고 통찰함.” 1957년 한국일보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딘 뒤 민국일보를 거쳐 63년부터 동아일보에서 일했다. 82년 3월부터 당대의 명문으로 꼽히는 ‘그게 이렇지요-김중배 세평’(85년 6월 이후 ‘김중배 칼럼’)을 연재했고, 90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되었으나 이듬해 “자본의 언론 통제”에 항거하며 사표를 내고 스스로 야인(野人)이 되었다. 93년 한겨레신문 사장, 2001년에는 문화방송 사장을 지내는 한편, ‘참여연대’와 ‘언론개혁시민연대’, ‘언론광장’ 대표로 시민운동과 언론민주화운동의 일선을 지켰다.

이승만부터 총 열한 명의 대통령 가운데 어떤 이는 그를 적대하고 어떤 이는 그를 흠모했지만, 그는 친소(親疎)에 얽매여 필봉을 굽힌 적도, 강압에 겁박당해 입을 다문 적도 없다. 그의 첫 칼럼 제목처럼 “입술 떨려도 진실만은”(1982년 3월6일치 동아일보) 저버리지 않겠다는 소신 때문에, 안기부 취조실에 끌려가기도 하고 해외로 내쫓긴 적도 있지만 그는 다시 돌아와서도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권력과 명예가 그의 곁을 스치고 지날 때에도 그 유혹에 흔들리거나 연연하지 않았고, 상대를 겨누는 비판의 잣대로 자신을 먼저 엄정하게 단속했다. 적잖은 이들이 권력을 경험한 뒤 권력에 중독되고, 폭력을 경험한 뒤 폭력에 길들여지지만, 김중배는 그저 한결같았다.

2015년 1월2일, ‘열림’의 신년 첫 인터뷰를 위해 서울 북촌의 한 찻집에서 그를 만났다. 찻집 앞 담장 너머로 헌법재판소 심판정이 보였다. 날카로운 겨울바람이 좁은 골목을 훑고 지나갔다. 김중배 선생이 몸담았던 언론계의 현실은 참담하고 그가 평생 추구해온 인권과 민주주의는 퇴행하고 있다. 그는 2015년을 어떤 심경으로 맞이할까. 우리는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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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익사범은 신고 안 해도 되나?’

-새해가 밝았는데 마음이 그리 가볍지 않다.

“새해라고 하면 사람들은 애써서 희망을 말하려고 한다.”

-맞다. 애를 써서.

“연초에 온갖 영상매체가 동해에 해 뜨는 걸 보여주는데, 정말로 밝은 바다 수평선 위로 빨간 해가… 시인 박두진 선생 식으로 딱 올라오면 좋겠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말갛게 씻은 얼굴”로 해가 솟지 않고….

“바다 위에 잔뜩 낀 구름을 뚫고 뜨는 해도 있고, 그나마도 구름에 가려 안 보이는 해도 있다. 그게 자연이다. 새해 첫해도 맑은 하늘에 깨끗이 떠오르지 않는 게 우리의 자연인데, 구름 안 낀 해만 보려고 하는 건 억지 아닌가? 새로운 희망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는 두툼한 원고지 뭉치를 천천히 펼치면서 말문을 열었다. 예상되는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단상들을 필사로 원고지 위에 꼼꼼히 적어 오신 모양이었다. 그는 지금도 컴퓨터 자판 대신, 원고지 위에 육필로 쓰기를 고집한다.

-건강은 괜찮으신가? 최근 부쩍 더 바빠지신 것 같다.

“녹색병원 양길승 원장한테 물어보니까, ‘그 연세에 그렇게 여기저기 쏘다니고 후배들이랑 술 마실 수 있는 정도면 괜찮은 거’라고 하더라.(웃음)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광장에 다니기 시작했고 얼마 전엔 통합진보당 강제해산에 반대하는 비상원탁회의 제안자로 참여했다. 요 앞 헌법재판소에 와서 심판선고 전 최종변론을 할 때 들었는데 그때 느낌이 아, 참 불길하고, 한참 묵은 헤게모니가 다시 살아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황교안 법무장관부터 정부 측 대리인들이 나와서 진보적 민주주의, 민중, 뭐 그런 얘기를 하는데….”

-그 용어들이 불온하단 얘긴가?

“그들은 그렇게 해석을 했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북한 주장을 받아들인 거고, 국가를 전복할 수 있는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이라고. 나중에 나온 헌재 결정문에도 그날 내가 들은 법무부의 법리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은 생각, 무언가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것을 잠정적 범죄행위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유신 시절 긴급조치와 다를 바 없다는 주장도 있다.

“어떤 이는 그렇게 말한다. 헌재 결정문을 보면 ‘헌재가 독심술을 했다’고 할 수 있다고.”

-“너 이런 생각하지?”라고….(웃음)

“대통령도 국가를 개조하겠다고 말하는데 대통령이 하면 괜찮고 다른 사람이 세상을 바꾸자고 하면 불순분자고 종북이라니…. 사실 종북, 좌익사범 이런 말들이 법리적인 개념도 아니고 레토릭에 가까운 말인데. 내가 어느 대학 가서 한 얘기지만, 전철을 타면 방송이 나오는데 ‘간첩, 좌익사범 신고하라’고 한다. 좌익사범은 신고해야지. 근데 나같이 신문기자 오래 한 사람은 균형 감각이 좀 있어서 나도 모 르게 나오는 말인데, ‘그럼 우익사범은 신고 안 해도 되나?’(웃음)”

-행정처분에 의한 정당해산은 58년 조봉암의 진보당 때 있었고 쿠데타 세력에 의한 정당해산은 5·16과 5·18 때 있었지만 이번처럼 사법기관에 의한 정당해산은 사상 처음이다.

“58년 얘기를 하시니까 말인데, 내가 팔십 평생을 넘어 살았지만 나 같은 사람한테 큰 충격은 1959년 조봉암 사형이었다. 그때 내가 한국일보 법조 출입기자였는데 진보당 사건 1, 2, 3심을 다 취재 보도했다. 법정에서 지켜보면서 조봉암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고 자기 당원들과 어떤 관계인지 매일 목격을 하게 되었는데, 일례로 재판하다 보면 조봉암과 다른 당원들 얘기가 엇갈릴 때가 있다. 그럼 재판장이 조봉암 선생한테 확인을 한다. ‘얘기가 다른데 어느 것이 맞냐?’고. 그러면 죽산(조봉암의 호)은 시종일관 예외 없이 ‘그 사람들이 맞다. 내가 착오를 일으켰다’고 답하더라.”

당시 김중배는 만 스물다섯, 입사 3년차의 신입 기자였다. 조봉암의 사형은 재심이 기각되자마자 “일사천리로 신속하게” 집행되었다. 조봉암의 사형집행을 제일 먼저 보도한 건 그가 속한 한국일보 팀이었다.

“희망이란 말은 오염됐고 거창
낙관의 단서만이라도 보고 싶다
그래서 여기저기 쏘다녔다
세월호 광장에서 만난 사람들
그런 것들이 다 낙관의 단서다”

앞으로 기자가 될 후배들은
‘다른 사람과 같이 살기’ 할
공감능력부터 다지기 바란다
지금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깊이·넓이로 접근할 문명전환기

조봉암 보도로 상과 술…나는 부끄러운 기자

-특종을 한 건가?

“특종이라기엔 좀… 그땐 신문사에서 시내 곳곳에 (긴급속보의) 벽보를 써 붙이곤 했는데 한국일보가 그게 빨랐나 보더라. 그 덕에 내가 무슨 상도 받았다. 그때만 해도 상 받으면 부원들이랑 회식을 하는 게 관례여서, 같은 부서 선후배들하고 정릉 가서 저녁 먹고 돌아오는데, 밤중에 우리가 탄 회사 차가 사람을 치어가지고 교통사고를 냈다.”

-저런….

“정말 충격이었다. 조봉암이란 한 시대의 정치인이 사형집행이 됐다는데 그걸 조금 빨리 보도했다고 상을 받고, 그 상금으로 술을 먹고, 그리고 돌아오다 보니 사람을 치고… 아, 이게 신문기자가 하는 일인가, 굉장한 회의가 들었다. 이 직업에 회의가 들고, 이런 일은 더 이상 못 할 것 같아서, 그만둘 생각도 했다.”

-마음을 돌린 계기가 뭔가?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들, 역사의 사초가 될 수도 있는 일들을 충실히 기록하는 것도 괴롭지만 의미있는 일일 수 있지 않나… 그래서 계속하게 됐다.”

‘괴롭지만 의미있는’ 기자의 길을 택할 때부터 그를 떠밀어온 동력은 “부끄러움”이었다. “부끄러움을 알아야만 비로소 부끄러움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다짐으로, 부끄러움을 이겨내게 된다”고 그는 믿었다. 그에게 부끄러움이란 “자아의 정립과 통제를 추구하기 위한 자기 처벌의 표현”(1979년 10월 ‘부끄러움의 깃발’ 중에서)이다.

-그 뒤로 기자를 그만두려고 한 적이 또 있나?

“몇 번 있었지만 사표를 작심하고 낸 것은 74년 자유언론실천선언 이후에 동아투위(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후배들이 쫓겨나고 나서였다. 난 그때 논설위원이었는데 최일남 선배하고 같이, 당시 편집인 주필이던 이동수 선생을 찾아가 사표를 냈더니 대뜸 ‘동아투위 때문에 그러지? 이제 곧 해결되네’ 해서….”

-해고자들이 곧 복직될 거란 얘기였나?

“그렇게 하겠다는 거지. 근데 결국 안 되었고….”

-해고되고 투옥되고 목숨을 바친 이들 덕에 우리 사회가 이만큼 왔지만 그 못지않게 어려운 시기에 내가 비겁한 게 아닐까 끊임없이 회의하면서도 살아남은 이들이….

“(말을 끊으며) 난 비겁한 게 아닐까 회의하는 게 아니라, 비겁했다고 단정한다.”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지 않나?

“그게 나를 연명케 한, 자기합리화의 이유였다. 그때 신문은 컴퓨터가 아니고 활자를 찍어서 인쇄를 하는 방식이었는데 ‘내 글이 사자(死字)가 아니고 활자(活字)가 되게 하자’ 마음먹고, 내가 참 비굴하지만….”

2009년 김중배의 기자생활 50년을 기념하며 그의 지인들이 펴낸 <대기자 김중배>에는 그의 육필 원고가 그대로 실려 있다. 최일남 선생의 표현대로 “활달하고 힘찬” 필체가 원고지 괘선 가득, 또박또박 씌어 있다. 한 글자, 한 글자, 꼭꼭 눌러쓴 김중배의 글은 무겁고 신랄한 자기성찰의 산물이다.

김중배는 1934년 광주에서 일본제국의 식민지 ‘신민’으로 태어났다. 소학교 입학시험을 보던 날 태평양전쟁이 터져서 소학교 내내 송진 모으고 논매기하는 노역에 동원되었다. 중학교 마치고 광주고등학교에 올라갈 무렵 한국전쟁이 났고, 휴전 직후인 53년 전남 법대 1회생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집안에서 법대를 강권해서 입학은 했지만, 본래 꿈은 문학에 있었던 터라 법학 공부에는 시들했다.

한 교수는 그의 답안지를 채점하며 “이게 답안지 같기도 하고, 수필 같기도 하다”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김중배는 광주의 문학동인 <영도>(零度)에서 시인 박봉우, 박성룡, 윤삼하 등과 교유하며 주로 문학 비평을 썼다.

-언제부터 기자가 될 생각을 했나? 대학생 때 사제(私製) 신문을 만들었다는 소문도 있던데.

“신문이라기보다…법대 안에서 심심하니까. 옛날 시험지 있지 않나. 거기에 선 긋고 막 써가지고….”

-혼자서?

“그렇지. 혼자 써서 친구들 돌려 보라고. 볼펜도 없을 때라 펜에다 잉크 찍어 필사해서 앞뒤로 써가지고 돌렸다.”

-왜?

“아니, 왜는 무슨… 그냥 한 거지.(웃음)”

필사로 촘촘히 적어 내려간 신문엔 <청춘타임즈>라고 그럴듯한 제목도 달았다. 졸업 무렵 집에서는 고등고시를 보라고 성화였지만 때마침 한국일보에 견습기자 뽑는 광고가 났다. 당시 신입기자를 뽑는 곳은 한국일보뿐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57년 기자가 되었고 4·19 뒤 “신문인을 위한 신문”을 표방하던 민국일보에 입사했다가 한국일보로 복귀, 63년 다시 동아일보로 자리를 옮겼다. 논설위원으로 재직하던 82년 3월부터 기명칼럼을 쓰기 시작했는데 84년 2월을 끝으로 칼럼은 폐지되었다. 당시 대형 권력비리 장영자 사건에 대해 쓴 글이 사단이었다.

‘사람이란 누구인가’라는 질문 던져야 할 때

-무슨 일이 있었나?

“퇴근하고 집에 가는데 (기관원들이) 우리 집 문 앞에 차를 딱 대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안기부 지하실에 데리고 가더니, 내 행적을 적은 파일을 들추며 한참 조사하다가 ‘당신, 자유민주주의자로군!’ 하더라.”

-그게 문제라고? 그럼 무슨 민주주의자라야 하나?

“모든 민주주의는 불온한 거지. 내가 장영자 사건에 대해 뭐라고 썼냐면, ‘바둑을 두다가 패착이 인정되면 바둑판을 딱 쓸고 다시 둬야 한다.’ 그랬더니 ‘이 새끼야, 이게 정부를 갈아엎어야 된다는 소리 아니냐!’고.”

84년 4월부터 1년간 김중배는 지면을 잃고 도쿄대 연구소로 보내졌다. 돌아와 85년 6월부터 그는 다시 칼럼을 재개했다. 김중배의 문자는 ‘살아있는 활자’가 되어 독자들 마음을 파고들었다. 87년 박종철이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죽었을 때 김중배가 쓴 글은 장엄한 조사(弔詞)이자 격문(檄文)으로 오랫동안 사람들 기억에 남아 있다.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기 바란다.(1987년 1월17일치 동아일보 ‘김중배 칼럼’ 중에서)

-박종철 죽음에 대해 쓰신 글을 다시 보니 이번 세월호 참사가 겹쳐 보여 더 마음이 쓰렸다.

“세월호라는 게 생명의 문제인데, 그걸 두고도 편이 갈리는 것. 이게 우리의 문제다. 작년 한해 내가 가장 비통했던 것은,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가 단식을 40일 넘게 할 때, 한쪽에선 피자, 치킨 이런 거 시켜 먹던 게…(참담한 표정). 세월호 참사 나고 한겨레에서 ‘이게 나라인가?’ 사설 제목을 달아서 많은 공감을 얻었는데, 동시에 ‘사람이란 누구인가’라는 더 원천적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인간이란 정말 어떤 존재일까?

“그런 관심 때문에 나도 진화생물학, 뇌과학 같은 분야를 해찰하게 됐다. 제러미 리프킨이 쓴 <공감의 시대>를 보니까 인간에게 공감을 각인하고 확산하는 뉴런들이 많다고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athicus·공감하는 인간)라는 용어가 나온다. 에드워드 윌슨도 <지구의 정복자>에서 개미나 인간처럼 집단적인 협력을 할 줄 아는 종이 다른 경쟁상대를 물리치고 사회적 정복자가 된다는 얘기를 한다. 이런 게 ‘낙관의 단서’를 찾아 해찰하고 다니는 내게는 상당한 격려가 된다.”

-왜 ‘희망’을 찾는다고 안 하시고 ‘낙관의 단서’라고 조심스레 말하시나?

“희망이란 말은 너무 거창해서 좀 오염이 된 듯, 허망하기도 하고. 희망이 한꺼번에 쫙 피어나는 것도 아닌데. 난 낙관의 단서만이라도 죽기 전에 많이 보고 싶다. 내 죽어도 절망하면서 죽고 싶지는 않아서. 내가 일은 잘 못했어도 나 잘못한 건 생각하지 않고(피식 웃으며) 그런 낙관의 단서가 보고 싶어 여기저기 쏘다녔다.”

-그래서 그 단서를 찾으셨나?

“얼마 전 뉴스타파 후원의 밤 한다고 해서 갔는데 후원회원들이 참 많이 오셨더라. 엠비시에서 쫓겨난 최승호 같은 이야 그렇다 치고, 쫓겨나지도 않았는데 제 발로 엠비시, 케이비에스 그만두고 나온 사람들이, 어설프지만 아마추어적인 순수함으로 쇼 같은 걸 하는데. 아, 월급도 전에 있던 직장의 반 토막도 안 될 테고 취재의 편의성도 비교가 안 될 텐데. 그 친구들이 ‘행복하다’고 하더라! 그 말 들으니 정말 가슴이 뜨거워졌다. 아, 저런 것이 있구나…. 세월호 광장에서 만난 사람들, 대구에서 올라온 30대 아줌마의 연설, 애들 손잡고 나온 젊은 엄마들, 국회의원 되고 싶다고 연설하던 어떤 고등학생… 이런 것들이 다 낙관의 단서가 된다. 어차피 일기의 기상예보처럼 역사를 예보할 수는 없는 건데. 인간에 대한 절망도 있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낙관의 단서를 얻을 수 있는 건 또 인간뿐이니까.”

-‘기레기’ 언론에도 변화의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이전에도 사람들이 언론인에게 ‘각성하라! 자성하라!’ 그러긴 했지만 2014년처럼 기자들이 공공연하게 쓰레기로 낙인찍힌 적은 없었다.

“지난날엔 권력의 압제에 저항하기 어려워서 문제가 생겼다면-물론 그걸로 다 변명이 되는 건 아닐 테지만- 이번 세월호 보도에선 다분히 저널리스트 자신들의 자발적이고 의도적인 측면이 크다는 게 특징이다. 언론인의 의식지형에 그간 심각한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사주나 권력의 외압과 광고로 대변되는 자본의 압력만이 문제가 아니라 거기 종사하는 자들의 세계 인식이나 현실 인식, 인간에 대한 인식이 원천적으로 달라진 게 아닌가.”

후배 기자들에게 선물하는 릴케의 시

-이제는 사주나 언론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것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기가 더 어려워진 듯한데, 그렇다면 에스엔에스(SNS) 같은 디지털 미디어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주류 언론인들은 인터넷언론이 아마추어적이고 휘발성이 강해서 프로페셔널 저널리즘의 대체재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기성 미디어에 종사하는 저널리스트들은 그럼 프로페셔널한가? 나는 그런 근원적인 물음부터 던지고 싶다. 황우석 사태를 결정지은 게 그들 올드 미디어였나? 정말 프로페셔널한 문제제기를 해서 결정타를 던진 게?”

-브릭(BRIC)이라는 온라인 커뮤니티였다.

“요즘 정치도 그렇고 언론도 마찬가지다. 권력게임하는 정치인만 정치인이 아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시민들이 다 정치인이다. 근데 자기들만 정치인이라고 한다. 언론도 그렇다. 모든 인간이 언론인이다.”

-끝으로 기자가 되기를 꿈꾸는 젊은 친구들에게 한 말씀 해 달라.

“기레기란 말이 저널리즘 종사자에겐 대단히 모욕적인 지칭이지만, 뒤집어보면 시민들이 현존하는 저널리즘의 실체를 확인한 각성과 통찰의 결과다. 이것을 그냥 지탄으로만 보는 건 단견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내가 기자가 돼야겠다는 동기를 찾았으면 좋겠다. 나 같은 세대는 기자를 워낙 쉽게 해먹었지만….”

-글 한 줄 쓸 때마다 잡혀갈까봐 마음 졸이는 게 뭐가 쉬운가?(웃음)

“난 젊은 세대로 안 살아봐서 잘 모르지만… 취업할 수 있는 데는 많이 늘었는데 막상 들어갈 곳은 없잖은가. 홍수가 난 탁류에 떠내려가면서 목이 마른 사람들처럼… 앞으로 기자가 될 후배들은 ‘다른 사람과 같이 살기’를 할 수 있는 공감능력부터 다지기를 바란다. 지금 같은 문명전환기에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깊이와 넓이로 진실에 접근해야 할 것이다. 협력과 공감을 중시해야 한다.”

김중배는 후배 기자들이 가슴에 담아두었으면 한다며, 릴케의 시 한 대목을 소개했다.

이진순 언론학 박사
이진순 언론학 박사
“지금 세계의 어느 곳에서 누가 울고 있다… 지금 세계의 어느 곳에서 누가 걷고 있다… 지금 세계의 어느 곳에서 누가 죽어 간다….”(릴케, ‘엄숙한 시간’ 중에서)

지난 팔십 평생 김중배의 가슴속에선 항상 누군가가 울고, 죽고, 아우성쳤을 것이다. 김중배는 한 사람의 언론인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로 어두운 시절 우리의 금지된 소통을 매개해 온 살아있는 미디어였다.

녹취 함규원(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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