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에 대한 동아일보사의 굴종 조짐은 1975년 2월12일 유신헌법에 대한 재신임을 묻는 국민투표 때부터 나타났다. 이날 <동아방송> ‘뉴스쇼’는 “평온한 가운데 활기찬 투표가 진행되고 있다”고 방송했다. 여러 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던 부정투표 사례들에 대한 고발은 물론 <동아일보>에도 한 줄 보도되지 않았다. ‘인혁당’이라는 단어를 제목으로 뽑지 못하도록 했고, ‘고문’은 ‘가혹행위’로 둔갑했으며, 인혁당 사건 피의자 부인이 중앙정보부에서 고문과 모욕을 당했다는 특종 기사도 고작 3단으로 보도되었다. 격려광고 문안을 멋대로 고치는 바람에 “다시는 광고를 내지 않겠다”는 항의가 쏟아지기도 했다.(<자유언론>,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해담솔, 2005년)
기자협회 동아일보분회는 2월17일치 <알림>을 통해 “끼니를 거르면서까지 ‘동아’를 격려해주고 있는 국민들의 눈동자를 항상 의식합시다”라고 회사 쪽에 요구했다. 하지만 2월28일 열린 동아일보사 정기 주주총회는 우리의 바람을 외면했다. 특히 지난 3년 동안 회사를 떠나 박정희 정권의 ‘안보 세미나’ 간사 노릇을 했던 이동욱이 다시 주필로 돌아왔다.
사장으로 재선임된 김상만 사주는 다음날 주총의 의결에 화답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어려운 때에 동아일보가 살아남는 길은 우선 질서를 세우는 일”이라며 “첫째, 주총과 이사회의 권한에 도전하는 언사나 행동은 용납할 수 없다. 둘째, 부차장·국장단·이사·사장 등에 대한 싸움조의 언사, 야유조의 언사나 행동은 용납할 수 없다. 셋째, 신문과 방송 제작 과정에서 몇몇 사람의 의견을 채택하라고 강요하면서 폭력행위를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넷째, 회사 내 무허가 집회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용납할 수 없다. 다섯째, 무허가 유인물은 용납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사회적 소통이 본분인 언론사가 갑자기 중세 봉건시대, 병영사회로 돌아가다니! 사주의 발표를 보고 우리는 회사 쪽이 결국 박 정권에 백기투항했음을 직감했다. 역시나 3월8일 회사는 ‘경영난’을 이유로 “기자 18명을 해임한다”고 발표했다. 폐지된 부서는 심의실·기획부·과학부·출판부 등이었다.
이는 박 정권과의 합작품이란 사실이 곧 드러났다. <조선일보>에서도 3월7일 5명의 기자를 해임한 데 이어 3월11일에는 37명의 기자를 무기정직시켰다. 이틀 뒤에는 <주간조선>을 아예 폐간했다. 박 정권은 3월12일 <기자협회보>를 강제 폐간시키고, 3월13일에는 김지하를 ‘형집행정지 취소’로 재수감시켜버렸다.
“언론자유운동으로 광고가 끊겨 경영이 어려워진다면 봉급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기자들이, 회사가 ‘경영난’을 이유로 동료들 목을 치는데 침묵한다면, 그들은 언론자유운동을 할 자격이 없는 양아치들일 것이다. 동아일보분회는 3월11일 총회를 열고 18명의 해고를 즉각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사쪽은 이 총회를 ‘불법집회’로 규정하고 장윤환 분회장과 박지동 기자를 해고했다. 박 기자는 이날 총회에서 “미친개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기자들 목을 마구 칠 수 있냐”는 발언으로 위계질서를 어겼다는 ‘혐의’였다. 동아일보사는 그렇게 ‘미친개’로 변해갔다.
3월12일 동아일보사의 편집국·출판국·동아방송은 일제히 제작거부와 농성에 들어갔고, 회사 쪽은 이날자로 기자 17명을 또 잘랐다. 동아방송은 오류동 송신소에서 음악만 내보냈고, 동아일보는 일부 제작 참여자를 끌어모아 ‘통신’을 받아 신문을 제작했다. 나를 포함해 편집부·교열부 기자 23명이 2층 공무국을 점거하고 단식을 불사하며 신문을 직접 제작하자, 회사 쪽은 <신아일보> <서울신문> 등의 제작·인쇄시설을 빌려 ‘신문 아닌 신문’을 ‘중단 없이’ 발간했다.
이에 항의하고자 분회에서는 3월12~16일 닷새간 사내에서 밤샘농성을 계속했다. 함석헌·천관우·김대중·김영삼·정일형·이태영·리영희·시노트 신부 등 거의 모든 재야인사들이 우리를 격려방문했다. 함세웅 신부는 뒷날 “그때 김상만 사장을 만났는데, 일행들이 ‘왜 기자들을 해고합니까, 동아일보마저 상업신문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고 따졌더니, ‘말 못할 사정이 있습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하더라”고 밝혔다.(<희망세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0년 1월호)
농성 나흘째인 3월15일 송건호 편집국장은 “해임기자 전원 복직”을 건의하며 사표를 던졌다. 그러나 3월18일 마침내 회사는 200여명의 폭력배와 총무국·판매국 사원 등을 동원해 새벽 3시 통금(자정~새벽 4시 통행금지 시간)인데도 농성 사원들을 회사 밖으로 몰아냈다. 2층 공무국 농성 기자 23명, 3층 편집국·출판국 기자 83명, 4층 방송국 사원 40여명 순으로 강제해산시켰는데 2시간가량이 걸렸다. 3층 편집국에서는 임시 분회장을 맡고 있던 고 안종필 위원장의 지휘로 침입자들을 잠시 몰아낸 뒤,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다시 낭독하고, ‘우리 승리하리라’ 노래를 합창했다. 만세삼창에 이어 ‘애국가’를 부른 우리는 ‘10·24 선언’ 이후 편집국에 내내 걸려 있던 ‘자유언론실천선언’ 족자를 걷어들고 스스로 편집국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동아일보사에는 두 번 다시 ‘언론자유의 혼’이 깃들지 못하고 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도움 강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