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연구기관인 한국원자력연구원이 ‘불법파견 상태에 있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하라’는 정부의 잇단 명령과 결정을 따르지 않고 버텨 비난을 사고 있다. 고용노동부가 행정명령을 위반했다며 과태료 5억여원을 부과했으나 이마저 거부했다. ‘좋은 일자리’의 모범을 보여야 할 국책연구기관이 되레 끈질긴 소송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대기업의 행태를 답습하는 꼴이다.
지난 3일 대전지방고용노동청은 사내하청 노동자 73명을 직접 고용하라는 시정명령을 거부한 원자력연구원에 과태료 5억3000만원을 부과하기로 결정했다. 노동청은 지난해 11월 연구원에서 일하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연구원이 도급을 가장해 실제로는 불법파견을 받고 있다’며 제기한 진정건에 대해 지난 7월 ‘불법파견이 맞으니 이들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라’는 취지의 결정을 내렸다.
연구원은 즉각 이런 행정명령을 취소해달라는 소송과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냈으나, 지난달 대전지법은 가처분신청을 “이유없다”며 기각했다. 그러자 노동청이 8월23일이 시한인 명령을 따르지 않은 데 대한 과태료를 부과한 것이다. 연구원 관계자는 15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노동청에) 소명 절차를 거치겠다”며 계속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을 방침을 밝혔다.
이뿐만이 아니다. 연구원은 지난 6월 강아무개씨 등 사내하청 노동자 2명을 불법파견으로 보고 직접 고용하도록 한 충남지방노동위원회의 판정도 거부하고 중앙노동위원회에 재심을 신청했다. 당시 충남지노위는 ‘신청인 2명은 도급이 아닌 파견 상태이며, 파견법을 적용받아 원자력연구원이 직접 고용해야 한다’고 판정했다. 지노위는 불법파견의 판단 근거로 △하청 노동자들이 수행한 업무는 국가기관 행정업무로 도급계약 대상 업무로 적절하지 않은 점 △도급업체가 독립적인 경영권과 인사권을 갖고 있지 않은 점 △도급업체가 자체 전문기술도 보유하지 않은 점 △한국원자력연구원이 전반적인 업무 지시를 했다는 점 등을 들었다.
고용노동청과 지방노동위 모두 일관된 결정을 하고 있으나 원자력연구원 쪽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연구원은 지난해 10월 하청노동자 28명이 대전지법에 제기한 근로자 지위확인 소송의 법률 대리인으로 현대자동차의 불법파견 소송을 맡고 있는 대형 법무법인 화우를 선임해 노동자들과 법적인 싸움을 하고 있다.
원자력연구원이 불법파견을 인정하지 않고 법원으로 사건을 계속 끌고 가는 것은 노동자가 불법파견을 인정받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라는 게 노동계의 시각이다. 사법사상 초유의 9급심이 진행중인 현대차 최병승씨 사건(한겨레 4월19일치 10면)에서 볼 수 있듯, 노동자에게 법적 싸움은 시간·비용적인 부담만을 안겨줄 뿐이다.
노동계는 민간기업에 모범을 보여야 할 국책연구원의 이런 행태는 문제라고 지적한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의 박점규 집행위원은 “이번 건은 박근혜 정부의 비정규직 공약이 사기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시금석이다. 국책연구기관이 불법파견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대기업을 따라가선 안 된다”고 비판했다. 전국민주노동조합 공공운수노조 한국원자력연구원 비정규직지회 황형진 부지회장은 “나만 해도 9년 정도 근무하는 동안 소속 업체가 4번이나 바뀌었다. 연구원이 정규직이 해야 하는 일을 사내하청에 떠넘기지 말고 직접고용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연구원 관계자는 “공공기관이라고 해서 법으로 보장된 재심 청구의 권리가 박탈당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연구원의 경우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현대차 비정규직 문제와 같은 선상에서 보면 안 된다. 우리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담당 업무가 전혀 다르다”고 해명했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