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바퀴는 정규직노동자가, 오른쪽 바퀴는 하청노동자가 조립한다.’
2000년대 초반, 이런 부조리의 극치를 보여주는 불법파견 논란이 제기됐다. 원청 정규직과 사내하청업체 노동자가 같은 일을 함께하면서, 원청 사용자의 지휘·감독을 받는 일이 완성차를 비롯한 제조업 현장에서 늘어나기 시작했다. 파견근로자보호에 관한 법률은 이를 불법으로 보고, 그렇게 사용된 파견업체(사내하청업체) 노동자를 원청이 직접고용할 의무를 부과한다.
하지만 노동자 스스로 불법파견을 입증하기는 매우 어려울 뿐더러,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 일하던 최병승씨는 2004년 사내하청업체에서 해고됐는데, 지방노동위원회·중앙노동위원회를 거쳐 대법원(재상고심 포함)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현대차의 노동자이고 해고가 부당하다는 사실을 최종확인 받는데 무려 8년의 시간이 걸렸다. 완성차 업계 최초의 불법파견 판결이었다. 최씨가 일하던 공정이 불법파견에 해당하니, 최씨와 함께 일하던 동료들도 현대차 노동자가 됐을까? 아니다. 현대차는 최씨 1명만 고용했다.
현대차 뿐만 아니라 기아·한국지엠(GM) 등 다른 완성차 업체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고용형태가 불법파견이고, 근로자 지위를 확인해 달라는 소송이 잇따라 제기됐다. 수년간의 1~3심 소송 끝에 대부분의 경우 완성차 업체들의 불법파견이 인정됐다. 하지만 최씨의 사례처럼 회사들은 소송에서 이긴 사람만 고용했다. 공장마다 수천명씩 되는 노동자들이 모두 지난한 소송의 과정을 거쳐야 자신의 권리를 찾을 수 있게 됐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첨탑에 오르는 투쟁을 했다. 회사의 ‘불법’을 바로잡으라는 ‘불법’ 투쟁을 한 노동자들은 개인당 수십억원의 손해배상소송을 당했다.
불법파견에 관한 법원의 판례가 쌓이고 판단기준이 ‘일반화’되면서, 고용노동부가 근로감독을 통해 불법파견으로 인정된 공정에서 일하는 사람 전체에 대해 직접고용 시정지시를 하기도 했다. 노동자 입장에선 몇년씩 걸리는 소송보다는 훨씬 빠르다. 하지만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회사들이 ‘사법적 판단’이 아니라는 이유로 정부의 시정지시를 무시한다. 노동부는 과태료를 부과하고, 회사는 이에 소송을 낸다. 노동부든 사법부든 ‘불법’을 인정하고, 회사 입장에서 이길 가능성이 없어도 일단 소송을 유지하는게 유리하다. 적어도 그 기간 동안에는 ‘불법’을 유지하며 싼 값에 사람을 부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제철이 그랬다. 노동부는 현대제철 당진공장과 순천공장을 근로감독한 뒤 일부 공정을 불법파견이라고 판단했고, 지난 2월 당진공장 하청업체 노동자 749명과 순천공장 515명을 직접고용하라고 시정지시했다. 순천공장 노동자 일부가 낸 근로자지위확인소송에서 2심까지 노동자들이 이겨 대법원에 계류중인 상황에서 노동부 역시 같은 판단을 한 것이다. 현대제철은 시정지시를 거부하고 과태료 119억8천만원을 부과받았다. 또한 이에 불복해 소송을 냈다.
“불법파견인지 법리적으로 다퉈볼 여지가 있다”며 직접고용을 거부한 현대제철이 이후 선택한 방법은 자회사를 설립해 하청업체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것이었다. 현대제철은 9월1일부로 당진(현대아이티시(ITC)), 인천(현대아이에스시(ISC)) 포항(현대아이엠시(IMC)) 등 3개 지역에 계열사를 설립해 하청업체 노동자들을 고용하겠다고 밝혔다. 현대제철은 임금과 처우가 원청 정규직의 80% 수준인 ‘양질의 일자리’, ‘노동부와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를 수용한 전향적 판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현대제철은 지난 7월7일 낸 보도자료에 자회사 고용이 “노동부 시정지시 이행에 대한 현대제철의 진정성과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앞뒤가 안 맞는 홍보문구까지 포함시켰다. 시정지시를 이행하지 않아 과태료 처분을 받았으면서, 시정지시 이행의 ‘진정성’과 ‘의지’를 보여줬다는 궤변이다.
현대제철의 자회사 고용을 ‘직접고용 시정지시’ 이행이라 할 수 있을까? 송영섭 금속노조법률원 변호사는 “파견법이 직접고용 의무를 부과한 것은 불법을 시정할 목적이고, 불법파견으로 인정되면 사용사업주가 직접 고용할 의무를 부과하기 때문에, 원청업체가 아닌 자회사가 고용하는 것은 파견법에 따른 의무를 이행한 것이라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애초 자신의 노동자가 아닌 사람을 싼 값에 자신의 노동자처럼 부린 것을 시정하라는 것인데, 다른 회사를 세워 고용하게 한다는 것은 불법파견 시정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사정을 모를리 없는 현대제철은 “정부도 공공부문 정규직화를 추진하면서 자회사 고용도 정규직화로 인정했다”며 자회사 고용의 정당성을 설파한다. 현대제철이 대놓고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정부가 ‘정규직화’와 관련해 민간기업에 잘못된 시그널을 줬기 때문이다.
한국도로공사는 대법원이 톨게이트 수납원 고용구조를 불법파견이라 판단했음에도, 2019년 자회사 고용을 강행했다. 직접고용을 요구하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정부는 ‘자회사 정규직도 정규직’이라고 강변했다. 공공부문은 아니지만 2017년 파리바게뜨 제빵기사 불법파견을 적발하고 직접고용 시정지시한 노동부는 파리바게뜨가 자회사를 통해 고용하는 것을 ‘사회적 합의’를 이유로 ‘용인’했다. 전국금속노동조합 관계자는 “같은 불법파견 사업장이었던 현대·기아자동차는 ‘특별채용’(대체로 사내하청업체 시절의 경력이 삭감된 채로 채용)으로 노동자를 고용했는데, 자회사 고용은 이에도 못미친다”며 “‘자회사 정규직도 정규직’이라는 정부의 입장이 민간부문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말했다.
금속노조 충남지부 현대제철비정규지회(노조)는 50일 넘게 당진공장 점거농성을 벌였다. 현대제철의 자회사 고용은 ‘꼼수’고, 노동부가 불법파견을 인정했으니 직접고용하라는 주장이었다. 추석연휴와 두번의 월급날을 거친 농성은 지난 13일 노동부의 입회 아래 원청과 노조의 합의로 해제됐다. 원청은 자회사 입사를 거부한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고용을 보장하고, 올해 말까지 원청과 노조가 협의해 하청 노동자들의 공정을 재배치하기로 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현대제철 당진공장은 원청 정규직 6200여명, 자회사 정규직 3200여명, 하청업체 소속 2800여명이 투입돼 일하게 됐다.
원래 하청업체가 맡았던 공정이 자회사로 이관되면, 자회사 고용을 거부한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을 우려가 컸지만 원청이 참여한 이번 합의로 고용불안은 덜게 됐다. 하지만 원청-자회사-하청업체 노동자들에게 각각 독립된 공정을 맡겨야 불법파견 논란이 없기 때문에, 공정을 분리하고 업무를 배치해야 하는 숙제가 남았다. 공정마다 노동조건이 다른 데다, 노동자 개인은 원래 맡았던 작업이 아닌 다른 작업을 하게 될 가능성도 적지 않아 합의 역시 진통이 예상된다.
게다가 노동부의 불법파견 판단에도 노동자들은 몇년이 걸릴지 모르는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을 진행해야 한다. 이미 2600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 소송을 취하하고 자회사로 입사하라고 ‘회유’했던 회사는 “점거농성은 불법”이라며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다. 십수년동안 (노동부 판단에 따르면) ‘불법’인 고용형태를 유지하며 막대한 이익을 누린 회사가 고작 50일간의 ‘불법점거’로 발생한 손해가 246억원이라며 당당하게 노동자들을 옭아매고 있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