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만금살리기 삼보일배단이 2003년 5월 23일 전북 부안 해창갯벌을 출발한 지 57일 만에 서울과 과천의 경계인 서울 방배동 남태령 고개를 넘어 서울에 들어서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새만금살리기 삼보일배단이 2003년 5월 23일 전북 부안 해창갯벌을 출발한 지 57일 만에 서울과 과천의 경계인 서울 방배동 남태령 고개를 넘어 서울에 들어서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오는 16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새만금 소송의 상고심 판결을 내린다.

15년 동안 공사 중단과 재개를 거듭하며 숱한 찬반 논란을 일으켰던 새만금 간척사업의 타당성이 최종적으로 법정에서 가려지는 것이다. 특히 4조원에 가까운 세금을 쏟아붓는 대형 국책사업인데다 1심과 2심이 정반대의 결론을 내린 터라, 대법원 최종판결에 더욱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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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승소땐 물막이 공사 탄력…4월말 완료원고 승소땐 갯벌공원조성 등 대안 힘받을듯

1·2심 엇갈린 판단=간척을 통한 농지확보라는 애초 사업계획을 달성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업과정에서 중대한 하자가 생겼는지가 이번 소송의 쟁점이지만 1심과 2심의 결론은 정반대로 엇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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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심을 맡았던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재판장 강영호)는 “새만금 사업이 농지조성이라는 당초의 사업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워지는 등 여러 변경사유가 생겼다”며 “애초 계획이 취소되거나 변경돼야 한다”며 원고 쪽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고법 특별4부(재판장 구욱서)는 “사업의 환경생태적 결함이나 경제성이 없을 것이라는 전망은 명백하게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업을 취소·변경할 정도의 중대한 문제가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각론에서도 마찬가지다. 수질문제를 놓고 1심 재판부는 “매립면허 처분 당시 수질대책만으로는 농업용 4급 수질을 만족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고, 담수호 수질관리가 어려울 것이라는 1998년 감사원의 특별감사 결과도 참고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수질관리가 용이한 동진강 유역부터 개발하는 ‘순차적 개발방식’ 등을 통해 수질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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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 문제에 대해서도 1심 재판부는 “수질보전에 비용이 많이 드는 등 경제적 타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경제성이 없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1심 판단을 뒤집었다. 항소심은 또 간척지를 농지로 사용한다는 정부 쪽 입장에 강한 의구심을 보인 1심과는 달리, 미래의 쌀 부족 문제에 대비한다는 정부 쪽 주장도 받아들였다. 지구온난화 등 이상기후, 쌀수입 개방 등으로 인한 식량위기, 남북통일 등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법원 선고 뒤 새만금의 운명은?=대법원이 정부 쪽 손을 들어주면, 선고 다음날부터 시작되는 2.7㎞ 개방구간의 끝막이 공사를 시작으로, 새만금 사업은 탄력을 받게 된다. 4월 말에 물막이 공사가 완료되면 전북 군산과 부안을 연결하는 세계 최대 길이(33㎞)의 방조제가 완성된다.

2007년 6월 토지이용계획이 확정된 뒤에는 하반기부터 1억2100만평(서울시 면적의 2/3)의 간척지를 얻기 위한 대규모 간척사업이 시작된다. 물론, 방조제를 쌓더라도 수질보전에는 문제가 없으며, 경제성도 충분하다는 그동안의 주장을 입증해야할 책임은 정부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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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쪽이 승리하면 정부는 애초 사업계획을 취소하거나 환경·생태·경제적 문제를 해소한 새로운 사업계획을 제출해 공유수면 매립면허를 다시 받아야한다. 그러나 판결을 통해 확인된 간척사업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새로운 사업계획을 세우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데다, 새로 수립된 사업계획에 대한 법적 분쟁이 다시 벌어질 가능성도 높다. 이 때문에 “방조제를 쌓지 않은 상태에서 갯벌공원 조성 등의 친환경적인 활용을 모색하자”는 환경단체 쪽 요구가 힘을 얻을 것으로 전망된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노 대통령, 해수부 장관땐 ‘반대’ 대선후보 경선부터 ‘찬성’ 돌아서새만금 사업의 이면에는 지역민심과 표를 의식한 정치논리가 숨겨져 있었다. 1970년대에 처음으로 구상됐으나, 80년대 중반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추진이 보류됐던 새만금 사업은 87년 12월 부활했다. 대통령 선거를 열흘 앞두고 전북 전주 유세에 나선 노태우 후보가 ‘새만금 지구 대단위 방조제 축조사업’을 발표한 것이다. 그 뒤 선거는 끝났지만 예산배정조차 받지 못하고 방치돼, 요란한 선거구호에 그치는 듯했다. 그렇게 잊혀져 가던 새만금 사업은 91년 또 다시 살아났다. 당시 김대중 신민당 총재가 청와대 회담을 통해 예산편성 약속을 받아낸 것이다. 92년 대선 때는 김영삼 후보도 서해안고속도로 건설과 함께 새만금 사업의 적극적인 추진을 공약으로 내밀었다. 그러나 96년 시화호 오염 문제가 불거지면서 우려의 목소리가 커졌다. 새만금을 복합산업단지로 개발하겠다는 유종근 전북지사의 구상은 논란을 한층 가열시켰다. 98년 감사원의 특별감사가 시작됐다. 결국 99년 4월 공사는 중단됐고 정부는 민관공동조사단을 만들어 사업 타당성 재검토에 들어갔다. 조사단의 보고서가 사업재개에 유리하도록 왜곡 작성됐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2001년 5월 사업을 강행하기로 결정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대선후보 경선 때부터 공사에 찬성한다는 뜻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갯벌의 가치가 상승해 최근에는 매립공사를 중단하고 복원하는 추세”라며 공사 반대 뜻을 밝혔던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과는 태도를 바꾼 것이었다. 김태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