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10만분의 1에 불과하다. 한겨레 자료사진
사람의 10만분의 1에 불과하다. 한겨레 자료사진

아이들은 몇 살 때쯤 수의 개념을 터득할까? 서너살쯤 된 보통의 아이는 3이나 4까지 헤아릴 수 있겠지만 수 체계를 명확히 이해하기는 버겁다. 로마인들은 넷째 아들까지만 이름을 지어주고 다섯째부터는 번호만 붙였다. 로마사에 옥타비우스(여덟번째), 데시무스(열번째) 같은 이름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다. 오늘날까지 흔적이 남아 있는 월 이름도 처음 네 달(3월부터 마르티우스, 아프릴리스, 마이우스, 유니우스)만 고유명으로 지었을 뿐 나머지에는 옥토버(8번째·10월), 디셈버(10번째·12월)처럼 순서 번호만 주어졌다. 수를 헤아리는 일 자체가 고난도인데 아이들은 ‘값이 없는 수’인 제로를 어떻게 알 게 될까? 미국 시카고대 심리학 교수 헨리 웰만은 1980년대 중반 아이들이 처음에는 제로보다 하나(일)를 더 작은 수로 인식하다 몇 단계를 거치면서 제로에 대한 개념을 깨닫게 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제로’가 등장해 현대 수체계의 근간을 이룬 건 30만년의 현대인(호모 사피엔스) 역사로 보면 오래지 않은 일이다. 제로는 ‘빈 자리(absence)’를 뜻하기도 하고 ‘값이 없는 수(nothing)’를 나타내기도 한다. 3천년 전 60진법을 사용한 바빌로니아인들은 큰 수를 나타내기 위해 ‘빈 자리’를 뜻하는 기호를 사용한 흔적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수 체계를 도입한 그리스인들은 지구 중심의 우주관 때문에 제로를 배척했으며, 중세 기독교는 그리스 세계관을 신과 연결해 제로 개념이 들어설 자리를 아예 틀어막았다. 지구를 중심으로 하늘의 별들은 여러 겹의 천구에 박혀 있다고 봤으며 맨 바깥의 천구를 움직이는 궁극의 원동력을 ‘무’나 ‘무한’이 아니라 ‘신’에게서 찾았다.

제로가 수체계로 자리잡은 것은 5~6세기 무렵 인도에서였다. 인도인들은 알렉산더대왕의 침입 때 도입된 바빌로니아 수체계를 원용해 9개의 숫자와 제로로 10진법을 완성했다. 인도를 점령한 아랍인들이 이 수체계를 서양에 전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9세기 수학자 무함마드 이븐무사 알콰리즈미(780~850)는 <알자브르 왈 무카발라>라는 수학책을 썼는데, 뒷날 책의 제목에서 대수학(알지브라)이라는 말이, 그의 이름에서 ‘알고리즘’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제로의 기호 ‘0’은 적어도 7세기 무렵부터 인도 문화권에서 쓰인 것으로 밝혀졌는데, 인도 이름은 공(空)을 뜻하는 ‘수냐’였고 아랍에서 ‘시프르’로 변했다가 서양 학자들이 라틴어 발음으로 ‘제피루스’로 부르던 것이 현재의 ‘제로’로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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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과학의 기틀인 수체계(기수법)의 우수성은 제로라는 개념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난도의 추상적 개념인 제로를 뉴런 수가 인간의 10만분의 1에 불과한 꿀벌이 이해할 수 있음을 오스트레일리아 과학자들이 밝혀냈다. 오스트레일리아 로열멜버른공대(RMIT) 연구팀은 최근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꿀벌들이 숫자를 헤아릴 줄 알 뿐더러 크고 작은 관계를 비교할 줄도 알고 제로를 수의 개념으로 이해한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 입증했다”고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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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팀은 흰 바탕에 1개에서 4개까지 여러 모양의 검은색 표지들이 들어 있는 판을 벌들에게 번갈아 보여주며 그룹별로 이상(great than)과 이하(less than) 등 비교 개념을 훈련시켰다. 그룹별로 벌들에게 색칠을 했으며, 과제를 잘 수행하면 설탕물을, 틀리면 맛이 쓴 키니네물을 줬다. 성공률이 80% 정도 이른 뒤에 설탕물이나 키니네물 없이도 벌들은 75% 안팎의 성공률로 이상, 이하 과제를 해냈다. 다음 표지가 아무것도 없는 빈 판을 추가하자 벌들은 ‘0’이 연속 수 가운데 작은 쪽에 놓인다는 것을 64~74%의 확률로 맞혔다.

연구팀의 두번째 실험은 벌들이 제로를 양적 개념으로 이해하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우선 또 다른 벌들을 2~5개 표지로 ‘이하’ 개념을 이해하도록 훈련시켰다. 이들 벌이 본 적이 없는, 표지가 1개만 있는 판(1)과 아무 것도 없는 판(0)을 제시하자 63% 안팎의 성공률로 제로가 1보다 작은 수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음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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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팀은 마지막으로 연속 수의 체계 안에서 ‘0’의 위치를 이해하는지 실험했다. ‘이하’ 개념을 훈련받은 벌들에게 1개에서 6개까지 표지가 들어 있는 판과 아무것도 없는 판을 짝지어 제시하자 모두 ‘0’을 잘 골라냈으며, 특히 제시된 숫자와 0의 거리가 멀수록 성공률이 높았다.

연구를 주도한 로열멜버른공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의 에이드리언 다이어 교수는 “제로는 현대 수학과 과학기술 발전의 중추이지만 터득하기 쉽지 않은 개념이다. 꽤 오랫동안 인간만이 이를 이해하는 지능을 지녔다고 생각돼왔지만 최근 연구들은 원숭이나 새 등 척추동물들이 인간과 같은 뇌를 가졌다는 것을 보여줬다. 연구팀은 무척추동물인 벌도 제로의 개념을 습득할 수 있을 뿐더러 숫자 서열상의 위치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고 말했다.

영국 옥스포드대와 일본 교토대 공동연구팀은 침팬지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컴퓨터 화면에서 점들을 보여주며 아라비아숫자 개념을 가르친 침팬지가 점이 없는 화면과 ‘0’을 일치시킨 연구 결과를 2001년 <동물 인지학>에 보고했다. 미국 브랜다이스대 연구팀은 앵무새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사람 말을 배운 앵무새는 같고 다름을 구분하는 실험에서 똑같은 것들을 보여주면서 다른 것이 있는지를 묻자 ‘없다’라고 대답했다. 다음 파랑, 빨강, 초록 막대조각 각각 1개, 4개, 6개를 쟁반에 펼쳐놓고 4개인 색깔은 무엇이냐고 물으니 앵무새는 ‘빨강’이라고 답변을 했다. 없는 숫자인 5개의 색깔을 물은 데 대해 앵무새는 ‘없다’고 똑같은 답변을 했다. 연구팀 논문은 2006년 <비교심리학저널>에 실렸다. 일본 교토대와 치바대 연구팀은 2011년 야생 긴꼬리원숭이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통해 원숭이들이 뺄셈을 할 줄 알고 1에서 1을 빼면 0이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음을 밝힌 논문을 <국제동물학저널>에 실었다. 연구자들은 실험자가 손에 먹이를 1~2개 보여준 뒤 통 속에 넣었다가 먹이를 0~2개씩 빼내면서 원숭이들이 먹이 찾는 행위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하는지를 관찰했다.

독일 튜빙겐대 신경생물학연구소의 안드레아스 니더 박사는 오스트레일리아연구팀 논문에 대한 <사이언스> 논평에서 “연구에서 나타난 벌들의 행동은 벌들이 양에 대한 추론을 한 데서 비롯한 것이지 단순한 학습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벌과 척추동물 사이의 계통발생학적 거리를 고려하면 매우 흥미로운 결과”라고 말했다. 다이어 교수는 “인간에 비해 10만분의 1에 불과한 100만개의 뉴런을 지닌 벌들이 제로 개념을 이해한다는 것은 인공지능(AI)을 쉽게 가르칠 단순하고 효율적인 방법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근영 선임기자 ky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