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5일 “지금의 상황은 북한의 위험천만한 도발에 대해서 강력하게 규탄하고 압박해야 할 때이지 대화를 말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지난 7월6일 독일 쾨르버재단 초청 연설에서 “(남북) 대화의 필요성이 과거 어느 때보다 절실해졌다”고 강조했던 것과 극명히 대조된다. 남북관계를 축으로 주변국을 움직여 한반도 정세를 주도하겠다던 문 대통령의 대북정책 방향이 북한의 6차 핵실험을 계기로 급선회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문 대통령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6일 개막하는 동방경제포럼 참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러시아 <타스> 통신과 한 인터뷰에서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나는 어떠한 차원의 대화도 피하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지금은 대화할 때가 아니다”란 점을 분명히 했다. 문 대통령은 ‘대북 제재와 대화 병행’ 기조를 유지해왔으나, 북한의 핵실험 이후 강경 대응 쪽으로 무게추를 급격히 옮기는 모양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과의 대화 무용론을 제기하며 초강경 압박을 내세우는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도 ‘평화적 해결’ 기조에서 후퇴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문 대통령은 <타스> 통신과 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북한체제 붕괴나 흡수 통일을 추진하지 않는다. 북핵 문제를 북한 체제를 보장하면서 해결하려 노력하고 있고 한반도의 견고한 평화 체제를 구축하길 바라고 있다”면서도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서는 북한이 핵·미사일 추가 도발을 중단해야 하며,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는 국제사회가 더욱 강력한 제재와 압박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발언은 문 대통령이 취임 이후 새 정부의 대북정책 구상을 종합적으로 밝힌 쾨르버재단 연설과 큰 차이를 보인다. 당시 문 대통령은 “군사적 긴장의 악순환이 한계점에 이른 지금, 대화의 필요성이 과거 어느 때보다 절실해졌다”며 “올바른 여건이 갖춰지고 한반도의 긴장과 대치국면을 전환시킬 계기가 된다면 나는 언제 어디서든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과 만날 용의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앞서 전날 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과의 전화통화 이후 청와대가 내놓은 서면 브리핑에도 두 정상의 대화·만남 때마다 단골 레퍼토리로 등장하던 ‘대화’나 ‘평화’라는 말 자체가 아예 사라졌다. 브리핑 첫 줄을 채운 것은 ‘한·미 미사일지침상 한국의 미사일 탄두중량 제한을 해제하기로 전격 합의했다’는 내용이었다. ‘대화를 통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란 말이 빠진 자리를 대신 채운 건, 한·미 두 정상이 북한의 6차 핵실험을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엄중한 도발”로 보고 “철통같은 대한방위공약을 재확인”하는 한편, “북한에 대한 최고도의 강력한 압박과 제재”와 함께 “더 강력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 결의 추진”에 나서겠다는 내용이었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에 대해 “탄두중량 해제 합의가 더 큰 부분이라 브리핑에서 따로 언급을 안 했을 뿐”이라며 “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일관되게 그 말씀(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을 했고, 현 단계에선 ‘대화를 위한 대화는 필요없다’는 합의가 이미 돼 있는 상태라 두 정상이 서로 이견이 있는 게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지금은 대화할 때가 아니다’라는 문 대통령의 발언은, 북핵 위기가 고조되면서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는 ‘안보 무능’에 대한 비판을 선제적으로 잠재워 대북 정책의 주도권을 지켜나가기 위한 측면도 있다. 또한 ‘대화무용론’을 제기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일정 정도 보조를 맞춰주는 것이 ‘선제타격론’ 등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방안이라는 판단도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청와대와 정부 각 부처에 주문한 한반도 평화 구상을 뒷받침할 수 있는 ‘창의적 해법’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지금은 대화할 때가 아니다’란 전술적 유턴을 하는 건, 문 대통령이 그토록 탈피하고자 했던 미·중 외교 의존도를 오히려 심화시킬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문 대통령 대선 캠프에 관여했던 한 남북관계 전문가는 “조건부 대화론은 ‘전략적 인내’란 이름 아래 아무 것도 하지 않던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의 정책 방향과 내용상 일치한다”며 “향후 남북대화의 물꼬를 트는 데 장애물이 될 수 있는 발언”이라고 우려했다.
이정애 노지원 기자 hongbyu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