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협상 과정에서 나온 '김종필-오히라 메모'는 청구권 액수와 명목을 둘러싼 교착상태가 고위급 정치회담으로 돌파구를 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62년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과 두 차례 단독회담을 하고 청구권 문제의 최종적인 합의를 끌어내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10월21일 열린 첫 회담에서 오히라 외상은 독립축하금 또는 경제자립 옅 명목으로 3억달러를 제시했고 김 부장은 6억달러로 맞서 합의도출에 실패했다.
김 부장이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길에 도쿄로 들른 11월12일 열린 두 번째 회담은 최종 담판의 성격이 강했다. 김 부장은 회담에 앞서 '독립축하금 또는 경제자립 옅금 명목 불가, 총액 6억달러 관철'을 요구하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긴급훈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3시간 30분간의 단독협상 끝에 한일회담의 최대 분수령이었던 청구권 문제를 타결지었고 이 결과를 '메모' 형식으로 작성을 했다.
메모는 『(1) 무상: 한국측 3억5천만달러(오픈 어카운트 포함), 일본측 2억5천만달러(오픈 어카운트 불포함)/이 것을 양자가 3억달러(오픈 어카운트 포함)로 10년 기간의 조기제공 가능조건으로 양 수뇌에게 건의한다.
(2) 유상(해외경제협력기금): 한국측 2억5천달러(이자율 3%이하, 7년거치, 20∼30년 상환) 일본측 1억달러(이자율 3.5%, 5년거치, 20년 상환)/이 것을 양자가 2억달러(10년기간 조기제공 가능조건, 이자율 3.5%, 거치 7년, 20년 상환)로 양 수뇌에게 건의한다.
(3) 수출입은행 차관에 대해서: 한국측은 별개의 취급을 희망, 일본측은 1억달러 이상을 프로젝트에 의해 신장가능. 이 것을 양자가 합의하여 국교정상화 이전이라도 협력할 수 있도록 추진할 것을 양 수뇌에게 건의한다』는 간결한 내용이었다.
김 부장은 "단독회담 후 생길 수 있는 해석의 차이를 방지하기 위해 메모를 남기도록 하자"고 제안을 하자 오히라 외상이 이를 수용해 메모가 작성됐다.
메모는 일본측이 한국에 제공할 청구권 액수로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차관 1억달러 이상'의 총액의 대강을 규정했지만 자금 명목은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은 거액의 별도 정치자금 제공설 등 갖가지 억측과 의혹이 제기되자 2년 후인 64년 12월 당시 극소수 야당 의원들에게 메모내용을 공개했으나 '밀실타협''정치적 결탁' 등의 비판을 불식시키지 못했다.
1963년 2월 박정희 의장 권유에 따라 자의반 타의반 첫 외유길에 나섰던 김 부장은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으로 굴욕외교를 비판하는 6.3사태가 일어나자 시국수습책의 일환으로 이듬해 또다시 2차 외유길에 올라야 했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