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금성 어머니는 시인 김지하의 모친이다. 박정희 군사독재 18년 동안 가장 길고도 혹독한 수난을 당했던 김지하를 외아들로 둔 어머니였다. 내내 아들의 옥바라지를 해야 했고, 고문과 사형선고를 받으며 사선을 넘나드는 자식을 지켜봐야 했다. 그 모진 세월 어머니는 어찌 이겨냈을까.

2008년 6월19일 밤 정금성 어머니의 부음을 받았다. 향년 85. 이태 전쯤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중이었지만 그렇게 영영 가실 줄은 몰랐다. 발인날은 마침 김지하의 장모, 고 박경리 선생의 49재였다. 어머니의 마지막 길은 추모 기사 한 줄 없이 쓸쓸했다.

그러나 정금성 어머니는 독재시절 이 땅에서 정의를 부르짖다 옥에 갇히고 목숨까지 잃어야 했던 모든 젊은이들의 어머니였고, 그 어머니들의 따뜻한 이웃이자 인도자였다. 구속자 가족의 표상이자 모범이었으며 가족운동을 몸으로 창시하고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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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4월3일 민청학련 사건이 터졌을 때부터 어머니는 놀라 어찌할 줄 모르는 구속자 가족들을 보살피기 시작했다. 65년 한-일 굴욕외교 반대 시위, 70년 <오적> 사건 등으로 수감됐던 아들의 옥바라지를 해온 어머니와 그 자신 옥살이를 했던 서강대생 김윤의 어머니 김한림 여사의 위로는 가족들에게 큰 힘을 주었다.

이윽고 9월 어머니들은 구속자가족협의회를 만들었다. 그해 11월14일 금식기도회를 끝내고 명동에서 종로3가까지 첫 거리시위도 해낸 어머니들은 11월21일에는 미국 대사관 앞에서 포드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반대하는 기습시위를 벌였다. 그때 대사관 쪽에서 철문을 굳게 닫아버리자 정금성 어머니는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다른 가족들도, 지나가던 사람들도 함께 눈시울을 적셨다. 이 때문에 79년 6월11일 카터 대통령 방한 때 어머니는 내내 연금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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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어머니들은 자식들의 아지트였던 미아리 유인태의 집에 모여 펼침막도 만들고 뜨개질도 했고 서로 돕기 위한 ‘계’도 만들었다. 훗날 리영희 교수는 계의 이름을 ‘한겨레 가족모임’이라 지어줬다. 유인태의 자형이자 김효순의 형 김병순이 주로 시중을 들었다.

정금성 어머니는 언론이 죽어 있던 그 시절 홀로 나서 여론의 길을 개척했다. 74년 7월9일 김지하를 비롯한 6명의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이 사형 구형을 받자, 어머니는 육군본부 앞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죄없는 학생들이 죽어간다’고 눈물로 호소했다. 이어 종로5가 기독교회관 301호실, 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 사무실로 달려간 어머니는 “사람 살리는 일이 더 급하지 않으냐. 제발 우리를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그 덕분에 7월18일 기독교회관에서 구속자를 위한 첫 기도모임이 열렸으니 이것이 목요기도회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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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발길은 노동자들의 구속사태 때도,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 때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지학순 주교의 도움으로 해마다 추석과 설날, 내복 한 벌씩을 양심수들에게 넣어주는 일도 도맡았다. 74년 12월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할 때 민주인사들의 서명을 받아 날랐고 기꺼이 연락병 노릇을 해냈다.

그처럼 담대하던 어머니도 75년 2월15일 풀려났던 김지하가 27일 만에 다시 투옥됐을 때는 아연 긴장했다. 문정현 신부와 함께 전국을 돌며 기도회마다 아들의 구명을 호소했다. 나와 변호인단에서 선교사를 통해 국외 반출하려던 김지하의 양심선언문을 회수해 오기도 했지만, 아들을 지키려는 그 마음을 알기에 누구도 어머니를 탓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치마 속이나 보따리에는 늘 정보와 자료가 가득 있었다. 원주와 서울을 수없이 오가며 지학순 주교와 신현봉·최기식 신부, 장일순 선생 등에게 소식을 전했다. 그 자료와 소식들이 76년 1월23일 원주교구 교육원에서 신구 교회 성직자들이 시국토론 끝에 발표한 ‘원주선언’의 밑거름이 되었다. 나는 그해 2월 중순 원주선언문을 인편으로 일본 가톨릭정의평화협의회로 보냈고, 훗날 영문으로도 번역돼 공개됐다. 이는 윤보선·김대중·정일형·이태영 등이 각각 준비하고 있던 3·1절 성명과 결합해 이른바 ‘3·1민주구국선언’으로 나타났다.

어머니는 늘 감시와 연행을 당하면서도 한번도 일을 그르치지 않았다. 한번은 원주로 가다가 중앙정보부 분소로 끌려갔는데, 기관원이 몸과 짐을 수색하려 하자 어머니는 배가 아픈 척 엎드려 자료를 재빨리 캐비닛 밑으로 밀어넣었다가 또 한번 쇼를 한 끝에 자료를 되찾아온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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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선언’ 사건의 대법원 판결이 있던 77년 3월22일 윤보선 선생을 비롯한 원로들이 ‘민주구국헌장’을 발표했을 때, 김한림 여사와 어머니는 추가 서명을 받고 다니다 뒤늦게 들통이 나 중정에 끌려가기도 했다. 훗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녹취에서 어머니는 그때 11일이나 갇혀 고초를 겪었다고 증언했다.

정금성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뵌 것은 2006년 1월23일 원주선언 30돌 기념 행사장에서였다. 맨 앞줄에 앉아 있다가 단상에서 내려오는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내게는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많다. 대학시절 어머니가 해주던 밥은 어찌 그리 맛있던지. 배추김치 줄기를 쭉쭉 찢어 밥숟갈에 얹어주는 손맛에 배가 터지도록 먹곤 했다. 옥바라지 틈틈이 농사도 지어 강낭콩 한주먹이라도 나눠주었고, 황석어젓 같은 별식도 갖다 주었다. 추석 때면 몸소 참깨를 구해서 짠 참기름을 인권변호사들한테 선물하곤 했다. 그래서 변호사는 물론 그 부인들로부터도 어머니는 언제나 대환영이었다. 그 어머니가 그립다.

정리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