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선생이 발행하던 잡지 <사상계>에 실린 부패정권을 풍자한 시 ‘오적’ 때문에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된 김지하 시인이 1970년 7월18일 재판장에서 스스로 변론을 하고 있다.
장준하 선생이 발행하던 잡지 <사상계>에 실린 부패정권을 풍자한 시 ‘오적’ 때문에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된 김지하 시인이 1970년 7월18일 재판장에서 스스로 변론을 하고 있다.

감옥 안팎 집필작전
안에서는 김지하
밖에서는 조영래
교도관이 날랐다
드디어 일본에서 공개

수상한 분위기
검찰 사형 조항 기소
가족 접견 불허·책 금지
재판 일사천리 조짐
재판부기피로 일단 막아

27일만에 재수감
‘인혁당 조작’ 발언으로
처가앞서 연행
“나는 공산주의자다”
정부 “김지하 자필” 발표

■ ‘고행-1974’와 27일 만의 재수감

김지하는 1975년 3월13일 오전 9시40분께 서울에서 원주 집으로 가려고 정릉의 처가에서 나오다가 중앙정보부에 연행, 구속되었다. 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으로 무기형을 받았다가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지 27일 만이었다. 그 순간을 마침 구속자가족협의회의 김한림 총무가 목격해 그의 연행 사실은 그날 목요기도회에서 바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와 동시에 중앙정보부는 원주의 집을 수색해 영등포교도소에서 수감중 작성했던 옥중메모를 비롯한 기록과 그의 서가에 꽂혀 있던 몇 권의 책을 압수해 갔다.

3월14일 중정이 밝힌 연행 사유는 그가 2월15일 석방 직후 했던 내외신 기자회견과 <동아일보>에 기고한 ‘고행-1974’에서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등 반국가단체를 찬양·고무하는 발언을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북괴’의 활동에 동조했다는 것이었다. 인혁당 사건의 조작 사실을 건드리는 것은 박정희 유신정권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실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이었지만 그때 그들은 어떻게든 조작설을 봉쇄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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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는 ‘고행-1974’에서 이렇게 썼다. “잿빛 하늘 나직히 비 뿌리는 어느날, 누군가 가래끓는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더군요. 1사상 15방에 있던 나와 1사하 17방에 있던 하재완씨 사이에 통방이 시작되었죠. … ‘말 마이소! 창자가 다 빠져나와 버리고 부서져 버리고 엉망진창입니다. … 저그들도 나보고 정치문제니께로 쬐끔만 참아달라고 합디다’ … 출정하다가 인혁당 이수병씨를 만났습니다. ‘정말 창피하군요. 이거 나라 위해 아무 일도 해보지도 못한 채 끌려들어와서 슬기로운 학생운동 똥칠하는 데에 어거지 부역이나 하고 있으니….’ 법정에서 경북대생 이강철이 분명하게 ‘나는 인혁당의 인자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그것을 잘 안다고 시인하지 않는다면서 검사 입회하에 전기고문을 수차례나 받았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소위 인혁당이란 것이 조작극이며 고문으로 이루어지는 저들의 전가비도의 결과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죠.”

기습적인 재판부 기피 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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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학련 사건으로 수감됐다가 1975년 ‘2·15 석방조치’로 풀려난 김지하 시인이 바로 이튿날 내외신 기자회견을 통해 ‘인혁당 사건 조작’ 등 박정희 유신정권을 비판하고 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감됐다가 1975년 ‘2·15 석방조치’로 풀려난 김지하 시인이 바로 이튿날 내외신 기자회견을 통해 ‘인혁당 사건 조작’ 등 박정희 유신정권을 비판하고 있다.

검찰의 공소장에 적힌 김지하의 혐의내용은 ‘인혁당 조작 발언’ 말고도 더 있었다. 집에서 찾아낸 ‘장일담’, ‘말뚝’의 작품구상 메모를 반국가단체를 찬양·고무하는 표현물 제작을 예비한 것으로, 몇권의 책은 반국가단체를 찬양·고무·동조할 목적으로 은닉·보관한 행위로 ‘반공법 4조1항·2항·5항’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4월4일 대한민국 문공부는 “나는 공산주의자다”라는 김지하의 자필진술서가 담긴 100쪽짜리 노란 표지의 책자 <김지하 반공법 위반 사건의 진상>을 국내외에 배포했다. 5월9일에는 이미 기소된 김지하에게 ‘반공법 9조2항’(재범자의 특수가중)을 추가하는 공소장을 변경했다. 이 조항은 ‘반공법 위반으로 형 집행중 5년 내에 또다시 반공법 4조를 위반하면 그 죄에 대한 법정형을 최고 사형으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애초 단독사건 재판부에 배당되었던 이 사건은 합의부로 옮겨졌다. 이는 김지하의 신변에 불길한 예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실로 박정희 유신독재의 광기가 절정에 이르러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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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에 대한 감옥 안의 감호 행태도 돌변했다. 가족 접견은 완전 불허였고, 성경을 포함해 그 어떤 책도 차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김지하의 말대로 ‘활자도 언어도 복음서마저도 없는 어둡고 좁은 독감방에 갇힌 채 면벽만이 전부인 무명의 나날’이었다. 그런 가운데 제1차 공판 기일이 잡혔다. 5월19일이었다. 재판은 일사천리로, 예정된 각본대로 진행될 것이 뻔했다. 어떻게 하든 우선은 재판을 최대한 늦춰야 했다.

변호인단에서 찾아낸 묘수는 재판부 기피 신청이었다. 재판장 권아무개는 74년 인혁당 사건을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재판할 때 민간법원에서 파견나간 심판관이었다. 법관 기피 사유에 ‘재판의 전제가 되는 사실 조사에 관여한 때’라는 것이 있는데, 인혁당 사건에 관여했던 판사가 인혁당 조작 주장이 주요 공소사실인 이 사건을 심리·재판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불공평한 재판을 할 우려가 있는 경우’에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 기피신청은 피고인 김지하가 직접 하기로 했다. 5월19일 오전 10시 판사들이 입장하고 인정신문을 시작하자 김지하는 “재판 개시 전에 할 얘기가 있다. 나는 재판부를 기피하겠다. 재판장이 인혁당 사건에서 비상보통군법회의 심판관을 했지 아니한가. 본 사건에 대해 예단을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한 이상, 결코 공평한 재판을 기대할 수 없다”고 치고 나왔다. 그것은 재판부나 검사, 그리고 중정조차도 예측하지 못한 기습이었다. 뜻밖의 기습에 재판부는 당황한 채로 일단 소송 진행을 연기했다. 기피신청 사건이 법원에서 종결될 때까지 재판이 무기연기된 것이다.

■ 감옥 안팎을 잇는 집필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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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2월15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김지하 시인이 재야에서 주최한 ‘민청학련 수감자 석방환영 모임’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함석헌 선생
1975년 2월15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김지하 시인이 재야에서 주최한 ‘민청학련 수감자 석방환영 모임’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함석헌 선생

앞서도 얘기했듯, 유신정권은 <김지하 반공법 위반 사건의 진상> 책자를 통해 그 자필진술서가 마치 김지하가 공산주의자라는 결정적인 증거나 되는 듯이 선전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 모략을 깨부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때 떠오른 것이 양심선언이었다. 앞서 74년 7월23일 지학순 주교가 보여준 전범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양심선언 집필 작전은 감옥의 안과 밖에서, 안과 밖을 넘나들며 진행되었다. 안에서는 김지하가, 밖에서는 수배중이던 조영래가 집필하고, 그 정리한 원고와 추신이 안팎으로 오가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안에서 김지하를 돕는 일은 교도관 전병용의 몫이었다. 전병용은 야간근무 때면 취침시간이 지나 모두가 잠든 것을 확인한 뒤에 필기구를 김지하에게 건네주었다. 김지하는 그때마다 거의 새벽녘이 다 될 때까지 집필을 계속했다. 전병용은 원고를 넘겨받아 퇴근 때 반출해 내게 전해줬다.(<감방별곡> 전병용 지음·1990)

만약을 대비해 양심선언의 작성과 반출 과정을 그럴듯하게 꿰맞추는 일도 중요했다. 필기구는 마침 항소이유서를 쓰기 위해 합법적으로 종이와 필기도구를 가지고 있던 옆방의 대학생한테 빌린 것으로 하기로 했고, 반출 심부름은 그 무렵 만기 출소하는 소년수가 명동성당의 윤형중 신부에게 전달한 것으로 짰다. 5월22일 그 소년수의 손에는 물고기 두 마리가 그려진 종이뭉치가 들려 있었고, 며칠 뒤 윤 신부에게 정확히 전달되었다.

■ 유신시대 기념비적 기록

 함께 풀려난 김동길 교수 등이 보인다.
함께 풀려난 김동길 교수 등이 보인다.

“정의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글을 보낸다”로 시작하는 양심선언은 일단 그 자필진술서에 대한 해명으로 시작한다. “그 진술서(제3회를 제2회로 고치고 제2회 조서는 파기처분한 문제의 그 문건)가 내 육체의 한 부분에 의해 쓰여진 것은 사실이다. … 한 무력한 개인이 대한민국의 대 중앙정보부에서 쓴 종이쪽지를 여러분은 얼마나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 6일째에는 그들이 미리 작성해 가지고 온 소위 ‘자필진술서’ 내용을 그들이 부르는 대로 낙서처럼 받아써 가지고 내던져 버렸던 것이다.”

이어 선언은 유신권력의 상투적인 용공조작에 정면으로 맞선다. 김지하의 양심선언이 한 개인의 그것이 아니라 한 시대의 증언이자 양심선언이 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어제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닌 이 지긋지긋한 반공법 제4조의 상투적, 견강부회적, 무차별적, 모략적 적용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정신적 성장과 발전을 가로막아온 최대의 질곡이며, 우리 민중으로부터 말의 자유를 빼앗아 숨막히는 암흑과 침묵의 문화를 보급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부패특권의 압제권력을 유지해온 최대 억압의 무기이다. 나는 이에 대하여 자유의 이름으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치떨리는 분노로 항의한다. 나는 나에게 들씌워진 이 더러운 질곡을 단호히 거부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개성의 허용,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온몸으로 요구한다.”

양심선언은 김지하의 문학적 상상력과 조영래의 탁월한 시대인식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유신시대의 기념비적 문건이다. ‘장일담’이라는 장엄한 민중신학적 작품구상처럼 김지하가 아니면 그려낼 수 없는 상상력이 펼쳐져 있는가 하면, 조영래가 아니면 쓸 수 없는 논리적 설득력이 읽는 이를 압도한다.

“총을 든 신부의 모습은 성스럽다. … 떨리는 걸음으로 골고다로 가는 길을 찾아 헤매는 인간을 사랑하기 위하여 자신의 죄악까지도 각오하는, 그리하여 지옥 끝까지도 가려 하는 그 처절한 사랑의 모습이 눈물겹도록 성스럽게 느껴진다. 비겁한 비폭력이 잔인한 폭력과 통하듯, ‘사랑의 폭력’은 ‘용기있는 비폭력’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 내가 지지하는 혁명은 이와 같은 철저한 비타협, 불복종의 비폭력주의와 고뇌스런 사랑의 폭력을 결합, 통일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다.”

■ 양심선언과 그 뒷이야기

김지하의 어머니 정금성 여사는 양심선언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전병용을 찾아와 중단을 호소했다. 또 홍콩으로 출국하는 선교사 편에 보내려던 양심선언문을 직접 되찾아온 일까지 있었다. 양심선언이 자칫 아들의 신변에 더 큰 위험을, 더 빨리 가져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어머니만의 조바심 때문이었다.

마침내 75년 8월4일 김지하의 양심선언은 일본의 가톨릭정의평화협의회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어와 영어, 그리고 한글로 온 세계에 공표되었다. 선언문은 윤형중 신부를 방문한 외국인 선교사를 통해 미국의 시노트 신부에게 전달되고 그것이 다시 일본에 전달된 것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양심선언은 경북 왜관의 분도수도원 원장이었던 오도 하스 아빠스에 의해 일찍이 일본의 정의평화협의회에 안전하게 전해져 있었다. 그 운반에는 명동 가톨릭여학생관의 콜레트 누아르 수녀가 중요한 몫을 했고, 일본에서 양심선언의 번역과 발표를 주도한 것은 송영순(바오로·1930~2004) 선생이었다.

양심선언이 일본에서 발표된 바로 그날 저녁, 중정은 김지하는 물론 사방을 담당했던 교도관 등 상당수를 연행했다. 그들은 양심선언의 작성과 반출 경위를 집요하게 추궁했지만, 이미 맞추어 놓은 진술 이상을 얻어내지는 못했다. 그 소년수도 조사를 받았지만, 그는 다만 심부름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중정에서 돌아온 김지하는 얼마 전까지 문세광이 있던 독방에 갇혔다. 방의 좌우 몇 개는 비워졌고, 24시간 티브이 카메라로 감시받는 등 더 모진 시련을 겪어야 했다. 보복이었다.

양심선언이 발표되자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김지하를 구출하기 위한 구명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김지하의 사상과 신앙을 보증하기 위한 성명서에는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 요한 메츠와 위르겐 몰트만을 비롯해서 북미 유럽과 제3세계의 15개 나라 200여명의 신학자가 서명했으며 빌리 브란트를 비롯한 세계적인 정치인·지식인들이 지지와 지원을 표명했다.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