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12월4일 서울고등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의 해고무효소송 2심 공판장에서 <동아일보> 해직기자들이 방청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얼굴 보이는 순서대로
1976년 12월4일 서울고등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의 해고무효소송 2심 공판장에서 <동아일보> 해직기자들이 방청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얼굴 보이는 순서대로

민권일지사건
유신체제 붕괴 1년전
‘동아투위소식’에
민주화운동 사건 게재
10명 구속 법정투쟁
어이없는 결말
법원 이유없이 공판 미루다
박정희 피격사망으로
긴급조치 해제되자
대법원서 면소 판결
안종필 장례식 ‘통곡의 바다’
유신체제말기 3년간
동아투위 위원장 ‘고초’
“내가 동투 일원 됐다는 것
내 인생의 행복이다”

■ 동아투위 민권일지 사건

1978년 10월24일은 자유언론실천선언 4돌이 되는 날이었다. 동아투위는 10·24선언 기념일에 발행할 <동아투위소식>에 제도언론에서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과 인권 관련 사건 등을 싣되, 특집으로 77년 10월부터 78년 10월까지 1년 동안 일어난 사건들을 종합·정리해 게재하기로 했다. 회사에서는 쫓겨났지만, 언론인의 사명을 다하려는 눈물겨운 몸부림이었다.

10·24선언 4돌 기념식은 서울 명동에 있는 음식점 한일관에서 열렸다. 동아투위 기자 70여명과 동아투위의 정신적 지주였던 천관우·송건호 선생을 비롯한 다수의 민주인사들이 참석했다. 이날 배포된 <동아투위소식>에는 ‘보도되지 않은 민주인권사건 일지’ 125건과 함께 자유언론을 압살하는 모든 제도와 법의 철폐를 주장하는 ‘진정한 민주·민족언론의 좌표’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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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 지금까지만 되돌아보아도 마땅히 언론이 하여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또 하지 않음으로써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땅의 정치적 문제, 경제적 문제, 사회적 문제를 몸으로 제기해야만 했고, 그럼으로써 또 그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박해와 고통을 받고 있는가. … 우리가 진정한 민주·민족 언론인으로서 언론자유와 사실보도의 권리를 갖고 다시 현역에 복귀하기 위해서는 자유언론을 압살하는 모든 제도와 법이 당연히 철폐되어야 함을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4돌을 맞아 분명히 천명하는 바이다.”

경찰은 이날 밤 10시쯤 귀가하던 동아투위 홍종민 총무를, 26일에는 동아투위 사무실에서 안종필 위원장과 안성열·박종만 기자를 연행했다. 28일에는 투위 사무실과 박종만 기자의 집을 수색해 ‘민주인권사건 일지’의 자료 등을 압수해 갔다. 30일에는 장윤환(위원장 대리)·이기만·임채정·정연주·이기중·김종철 기자를 차례로 연행했다. 11월1일 조사받던 투위 위원 10명 가운데 안종필·홍종민·안성열·장윤환·박종만·김종철 기자 등 6명이 구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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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0일에는 또 11월17일치 <동아투위소식>을 문제삼아 이병주(위원장 대리)·양한수(총무 대리)·정연주 기자 등을 연행하고, 사무실을 수색해 등사기와 유인물을 압수해 갔다. 이 가운데 정연주 기자는 11월27일 역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동아투위는 10월25일부터 낮에는 청진동의 투위 사무실에서 농성을 하고 밤에는 건물 앞 인도에서 침묵시위를 벌였다. 민주단체와 인사들의 격려가 쇄도했고, 각계의 항의와 동조 성명도 잇따랐다. 10월27일에는 조선투위가, 11월3일에는 한국인권운동협의회·해직교수협의회·자유실천문인협의회 등 7개 단체가 ‘표현과 언론의 자유에 대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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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1차 민권일지 사건으로 구속·송치된 7명의 기자를 4개의 독립된 사건으로 분리해서 기소했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동아투위가 성명서 등을 통해 밝혀온 ‘언론 자유’ 주장을 문제삼거나, 심지어 ‘다른 사람이 낭독하는 성명서를 눈으로 따라 읽음으로써 유신헌법의 폐지를 주장했다’는 억지로 점철된 내용을 공소사실로 삼았다. 분리기소는 실로 구차하고도 비열한 꼼수였다.

동아투위는 위원장 및 상임위원 거의 전부가 구속·기소되는 사태를 맞아 “이 땅의 자유언론은 감옥으로 잡혀갔다”고 규정하고, 이부영 기자를 간사로 한 ‘법정투쟁 특별대책위’를 가동했다. 이돈명·홍성우·황인철 등 전국의 변호사 22명이 참여해 대규모 변호인단을 구성했다.

법원은 변호인단의 병합심리 요청을 거부하되 단 하나의 재판부로 통합·배당했다. 법정은 자유언론과 민주화운동의 토론장처럼 열기가 가득했다. 피고인들은 당당했다.

“저는 유신헌법을 비방한 것이 아니라, 유신헌법이 민주헌정의 파괴자라고 사실을 사실대로 말한 죄밖에 없습니다.”(안성열) “우리가 현역은 아니지만, 언론인이라는 자부심과 사명감을 갖고, 적어도 기록으로나마 남겨두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보도되지 않은 민주인권 일지’를 제작, 보도한 것입니다.”(박종만) “우리는 없는 사실이 아니라 엄연히 있는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했다는 이유로 잡혀들어와 있습니다. 이것은 1970년대 후반에 벌어지는 코미디입니다.”(정연주) “당시 대학생과 종교인들의 신문에 대한 불신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 우리들은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하게 된 것입니다.”(장윤환) “그때(동아일보사에서 쫓겨났을 때) 우리는 선언했습니다. 우리들이 동아일보를 마지막 제작했던 75년 3월10일치로 동아일보의 지령은 끝났다고, 그리고 동아일보의 정통성은 우리들에게 있음을 선언했습니다.”(김종철) “자유언론이 보장되지 않으면 그 사회는 썩고 미치고 맙니다. … 우리들은 기자입니다. 전 소설가, 전 법조인이 있을 수 없듯이 우리는 전 언론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론인입니다. 다만 잠깐 현장에서 타의에 의해 강제로 물러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기자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안종필) “말 못하는 어린이는 울음으로써 의사를 표시합니다. 언론이란 인간의 자기표현입니다. 아무리 긴급조치라도 자유언론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홍종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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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석봉·문영희·김종철·이인철·안성렬·심재덕·박종만·김두식 기자. 맨오른쪽은 당시 동아일보사 인사부장 유옥재. 전민조 전 <동아일보> 사진기자 제공
윤석봉·문영희·김종철·이인철·안성렬·심재덕·박종만·김두식 기자. 맨오른쪽은 당시 동아일보사 인사부장 유옥재. 전민조 전 <동아일보> 사진기자 제공

제5회 공판에서 변호인단은 검찰이 문제삼고 있는 ‘10·17 국민선언’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문익환 목사를, 그리고 검찰이 주장하는 사실왜곡 여부를 가리기 위해 천관우·송건호·조세형·남재희, 그리고 이동욱 동아일보사 사장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제6회 공판에서 재판장은 검찰 쪽의 증거는 모두 채택하고 변호인단이 신청한 증인 신청은 ‘이유없다’고 거부했다. 그러자 홍종민 총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재판을 더이상 받을 수 없어 재판부를 기피한다”고 선언해, 재판은 일단 중단되고 재판부 기피 신청에 대한 결정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나 형사지방법원 제12부는 79년 3월15일 이 신청을 ‘이유없다’고 기각 결정했다. 변호인단은 즉시 서울고등법원에 항고했으나 기각당했고, 대법원에 대한 재항고도 79년 4월30일에 역시 기각당했다.

79년 5월7일 제7회 공판은 정연주 기자의 재판거부로 휴정과 속개가 되풀이됐지만 검찰은 피고인별로 5년에서 2년6개월의 구형을 했다. 변호인단은 변론 대신에 사임을 선언했다. 7명의 피고인들은 최후진술을 거부했다. 이어 8월8일 항소심 선고공판에서는 안종필 위원장의 항소를 기각하고, 나머지는 징역과 자격정지 1년(장윤환·홍종민)에서 1년6월(안성열·박종만·김종철·정연주)까지를 선고했다.

항소심에서 박세경 변호사는 미국 의회에서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이 행한 한국 관련 연설을 인용했다. “남한에는 종신 대통령인 박정희 장군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그는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임명하고, 여당 국회의원 후보를 추천한다. 그는 국회를 해산할 수 있고, 징계할 수 있으며, 위헌 여부를 가리는 헌법위원을 임명한다. 그는 또 국가안녕에 심각한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면 긴급조치를 내릴 수 있다. … 더욱이 동아투위 사건은 75년 언론자유를 주장하며 신문사에서 면직된 기자들에 대한 것인데, 이들이 신문에 보도되지 않은 기사를 기록·배포했다고 해서 10명을 구속했다. 이들 중 7명이 지금 재판을 받고 있다.”

1978년 10월 <동아투위소식>에 실린 민권일지 사건으로 구속됐던 안종필 동아투위 초대 위원장은 옥중에서 얻은 불치병으로 석방 석달 만인 80년 2월29일 타계했다. 서울대병원에서 이해동 목사의 주재로 영결식이 진행되고 있다.   <자유언론> 중에서
1978년 10월 <동아투위소식>에 실린 민권일지 사건으로 구속됐던 안종필 동아투위 초대 위원장은 옥중에서 얻은 불치병으로 석방 석달 만인 80년 2월29일 타계했다. 서울대병원에서 이해동 목사의 주재로 영결식이 진행되고 있다. <자유언론> 중에서
■ 2차 민주인권일지 사건

동아투위는 78년 12월27일 명동성당에서 200여명의 민주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송년모임을 했다. <동아투위소식>도 배포했다. 그런데 10여일 뒤인 79년 1월9일 경찰은 윤활식(위원장 대리)·이기중(총무 대리)·성유보 기자를 연행해 1주일 만인 1월15일에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이것이 이른바 ‘제2차 민권일지 사건’이다. 소식지에 실린 ‘자유언론은 영원한 실천과제’라는 글이 긴급조치 9호를 비방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민주인권일지 사건’으로 구속된 동아투위 기자들은 모두 10명이 되었다.

재판부(서울형사지법 합의14부)는 이유없이 공판을 미루다가 구속 5개월 만인 6월4일 첫 공판을 열더니 그 후 1주일마다 공판을 진행해 1심 만료시한인 7월14일을 하루 앞둔 7월13일 선고를 했다. 이에 앞서 피고인들의 최후진술이 있었다.

“언론자유는 언론인 스스로가 쟁취해야 된다는 것이 나의 신념입니다. … 언론인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 오늘날의 언론인은 너나없이 각성해야 합니다. 이것이 민주회복이요, 자유언론 보전의 길입니다.”(윤활식) “긴급조치는 천재지변 등 급박한 상황에서 마치 환자에게 극약을 투약하듯 사용되어야 합니다. … 우리 국민은 이런 극약을 4년이나 강제로 장복당하고 있습니다. 그 독성이 온 나라에 퍼져 있습니다. 이건 긴급조치가 아닙니다.”(이기중) “민족적 번영, 민중 전체의 행복, 국가의 안보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아래 언론자유를 실현하여 민족적 통합을 이룩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역사적 소명입니다.”(성유보)

제1·2차 민권일지 사건의 상고심은 79년 12월10일 자정 긴급조치가 해제됨으로써 심리를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이어 12월27일 대법원이 1·2차 민권일지 사건 관련자 10명에게 면소 판결을 내림으로써 법률적으로는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유신체제가 붕괴되기 꼭 1년 전에 터져 미국 의회에서까지 거론될 정도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사건치고는 너무나 어이없는 결말이었다.

그러나 ‘민주인권일지 사건’은 안종필 동아투위 위원장의 죽음을 가져오는 빌미가 됐다. 그는 유신정권이 10·26사태로 무너진 뒤인 79년 12월4일 구속집행정지로 출감했지만, 투옥중 얻은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80년 2월29일 타계했다. 그는 130여명이 회사로부터 축출당하던 당시 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장이었으며 유신체제 말기 3년 동안에는 동아투위의 위원장으로서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선도했다. 그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탁월한 지도력으로 동아투위를 이끌었다. 그의 죽음은 사실상 순직이었다. 서울대병원에서 치러진 그의 장례식은 그야말로 통곡의 바다였다.

안종필 위원장은 투옥중 찾아간 변호사와 동료들에게 앞으로 탄생시킬 언론과 그 언론이 어떠해야 하는가 등 자신의 철학과 구상을 피력했다. “새 시대가 오면 국민들이 주인이 되는 신문사를 세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 그리고 제도언론에 의해 묵살당하고 심지어는 왜곡까지 당한 이 땅의 70년대 진실을 우리 손으로 생생하게 기록하고 발표하고 증언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언론의 길이다. 내가 동아투위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이 내 인생의 행복이다.”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