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석 천관우 선생은 동아·조선 자유언론투쟁위원회의 정신적인 지주였다. 해마다 정초가 되면 서울 불광동 자택에는 동아·조선투위 기자들을 비롯한 세배객들로 들끓었다. 1978년 3월에는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동아투위의 단식농성을 그 집에서 했다. 후배 남재희는 이때의 천관우를 가리켜 ‘성주’와 같았다고 했다.

자유언론투쟁위원회가 1돌을 맞이했을 때 천관우는 이런 격려의 글을 보냈다. “이것은 과거 한동안 언론계에 몸담았었고, 지금은 실제의 언론활동을 못하고는 있지만 아직도 언론인으로 떳떳이 자처하고 있는 한 선배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경의입니다.” 이 얼마나 위안이 되고 용기를 주는 말이었던가.

그러나 80년 이후 91년 작고할 때까지 민주화 진영은 물론 동아·조선투위 기자들까지 그와 발길을 끊었다. 전두환 군사정권 아래서 국토통일원 고문,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의장, 평화통일정책자문위원회 위원, 국정 자문위원으로 들어가면서부터였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광고

2004년 한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부인(최정옥)은 이렇게 말했다. “남편은 사람들이 쉽게 이야기한 것처럼 암이나 술로 죽은 것이 아니고, 주위의 비난 화살에 괴로워하다 죽었다.” 아마도 이 말은 사실일 것이다.

80년 3월 ‘지식인 134인 선언’에 참여한 것을 마지막으로 그는 민주화운동과 결별했다. 왜 그랬을까. 부인은 “전두환과 독대를 하고 ‘7년 단임을 꼭 한다’는 약속을 받아내고서 입을 다문 것인데, 사람들은 천관우가 돈을 받았다고 오해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그 무렵 너무 지쳐 있었고, 어쩌면 가난이 그로 하여금 전두환의 유혹에 빠지게 만든 빌미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광고
광고

76년쯤이었다. 이호철(소설가)로부터 천 선생이 때로 집 마당에 나와서 고래고래 큰소리로 “누구 나와라”고 외치는데, 그 누구가 바로 나(김정남)라는 것이다. 당시 선생의 집은 이호철과 이웃해 있었고, 나는 등 너머 10분 거리에 살았다. 그의 전언은 나를 몹시 당황하게 했다.

나는 그즈음 막 결성된 민주회복국민회의의 집행부 일을 거들고 있었는데, 선생이 화를 낸 것은 아마도 내가 대표위원도 무시하고 멋대로 일을 처리한다는 오해에서 비롯된 듯싶었다. 그해 추석 때 선생 댁을 찾았다. 그러나 정작 만나서는 별다른 질책이 없었다. 언제나처럼 술독만 비우고, 나는 술이 취해 그 집에 쓰러져 자다가 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이런 인연으로 이후 선생은 내게 서먹서먹해했다. 지금 생각하면 왜 자주 찾아뵙지 않았는지 후회스럽지만 그때는 그랬다. 91년 그의 부음을 듣고서도, 남들처럼 나도 그의 빈소를 찾아가지 못했다. 변명 같지만, 독재란 것이 인간을 참으로 옹졸하게 만들었다.

광고

천관우는 충북 제천시 청풍면에서 비교적 유복하게 태어났다. 9살 때 글씨 잘 쓰는 소년으로 <동아일보>에 소개될 만큼 신동으로 알려졌다. 51년 1월 임시수도 부산에서 <대한통신> 외신부 기자로 언론활동을 시작했다. 이듬해 미국 미네소타대학에서 연수할 때 쓴 ‘그랜드 캐년’은 우리 세대 고교 국어 교과서에 실릴 만큼 필력을 인정받았다.

54년 <한국일보>에 들어가 곧 논설위원이 됐고, 2년 뒤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기더니 2년 만인 33살 때 편집국장이 됐다. 65년 동아일보 주필을 거쳐 68년 <신동아>의 ‘차관’ 관련 기사로 필화사건을 겪으면서 해임되었다가 70년 복귀하지만 71년 12월 박정희 정권의 압력으로 타의에 의해 퇴임하면서 언론 현장을 떠났다. 69년에 쓴 칼럼의 제목 ‘연탄가스에 중독된 신문’은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그 자신 꿈꾸었듯이, 그는 당대의 대기자였다.

그와 동시에 ‘민주수호국민협의회’(민수협) 창립을 주도한 그는 재야 민주화운동에 투신한다. 박정희 일당은 67년 6·8선거에서 ‘3선 연임’을 위한 원내 3분의 2의 개헌선을 확보하기 위해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결국 날치기 통과된 ‘3선 개헌안’은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되고 말았다. 야당과 재야는 ‘3선 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해 공동투쟁에 나섰으나 무위로 끝났다. 이에 71년 4월27일 대통령 선거일을 앞두고, 3월20일 천관우는 이병린 등과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 준비에 착수해 4월19일 발족식을 했다. 이병린·김재준과 함께 그가 3인 대표위원으로 선임됐다.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선포해 영구집권으로 향하자, 73년 11월5일 대학가의 반유신 투쟁과 때를 같이해, 재야 15인이 와이엠시에이(YMCA)에서 유신 철폐를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사실상 민수협의 천관우가 주도한 것이었다. 이호철의 말로는, 74년 8월20일 그가 홀로 작성해 발표한 민주회복 절규 성명은 민수협의 장렬한 끝이었다.

광고

“죽은 후 1년 내에 출판해 달라”며 남긴 유고가 역사와 관련된 것만 큰 종이상자로 4개가 넘었다는데, 20주기였던 지난해에야 추모문집 <거인 천관우>가 출간되었다.

그는 거구에 호방하면서도 지나치게 노여움을 많이 타는 섬세한 일면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민주화운동을 하면서도 정치인과 한패로 어울리거나 한패로 몰리는 것을 지나치리만큼 경계했다. 장준하가 정치를 할 때는 그가 민주수호국민협의회에 참여하는 것조차 몹시 꺼렸다. 그만큼 개결한 성품이었다. 발표하는 문장을 두고서도 구석구석 단어 하나까지 철저하게 챙겼다. 따라서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분명했다.

천관우 선생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고 죄송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누가 뭐래도 그는 탁월한 역사학도였고, 기개 있는 선비이자 언론인이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암흑이 지배했던 그 시절, 이 나라 재야 민주화운동을 창도하고 이끈 우뚝한 지도자였다.

정리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