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배상해야 한다는 한국 법원의 판결이 나온 8일 서울 종로구 ‘평화의 소녀상’ 앞에 놓여 있던 피해자들의 사진. 연합뉴스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배상해야 한다는 한국 법원의 판결이 나온 8일 서울 종로구 ‘평화의 소녀상’ 앞에 놓여 있던 피해자들의 사진. 연합뉴스

한국 법원의 8일 일본군 ‘위안부’ 배상 판결과 관련해 일본 언론들이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 가능성을 언급하고 나섰다. 인류에 대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인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30년에 걸친 지루한 외교 공방을 끝내고, 판결을 이행하려면 한국에서도 이에 응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 내 우익 정서를 반영하는 <산케이신문>은 9일 정부 당국자를 인용해 서울중앙지법의 위안부 판결과 관련해 “일본 정부가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재판권에 따르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항소하지 않는 한편, 국제사법의 무대에서 한국의 부당성을 분명히 하겠다는 생각”이라고 전했다. 이어 <아사히신문>도 10일 같은 취지의 보도를 통해 일본 정부가 “소송 절차의 추이나 한국 쪽의 대응을 봐가면서 판단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제사법재판소는 국가 간 분쟁이 발생할 경우 국제법에 따라 해결하는 기관이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독도를 둘러싼 영토 분쟁,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 판결로 확정된 강제동원 피해자의 배상 문제 등에 대해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서 문제를 풀자는 뜻을 공식·비공식적으로 제안해 왔다. 국제사법재판소의 판단을 받으려면 두 나라 모두의 동의가 필요한데, 한국이 응하지 않아 실현된 적은 없다. 이를 염두에 둔 듯 일본 정부 고위 당국자는 <아사히신문>에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도 유력한 선택지다. 응하지 않는다면, 한국 쪽의 입장이 나빠지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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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그동안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자는 일본의 요청을 거부한 것은 독도의 경우 실효 지배 중인 영토 문제를 풀기 위해 국제사법재판소에 가는 것은 아무런 실익이 없고, 대법 판결의 경우 일제에 의한 조선인 강제동원이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되지 않은 ‘반인도적 불법행위’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 100%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 최고법원인 대법원의 판결이 뒤집힐 경우 정부도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는 1996년의 유엔 인권위원회의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1998년의 유엔 인권 소위원회 맥두걸 보고서 등을 통해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 ‘인도에 반한 범죄’라는 사실이 거듭 확인된 바 있다. 국제사법재판소도 “일본 정부가 계획·조직적으로 광범위하게 자행한 (전시하 여성에 대한) 반인도적 범죄행위”인 위안부 문제에 대해선 ‘국내 법원이 외국 정부에 대한 소송에서 재판권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국제 관습법상의 주권면제(국가면제) 원칙을 적용하지 않은 한국 법원 판단에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다. 그 때문인지 <산케이신문>도 “상대의 씨름판에 오르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일본에 불리한 경기장에서 승부를 벌이게 될 수 있다)는 정부 내 신중론도 소개했다.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상은 9일 기자회견에서 “국제법상 양국 관계에서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이상사태”가 발생했다며 “여러 선택지를 시야에 두면서 의연히 대응하겠다”고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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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국제사법재판소의 판단을 구하게 된다면 △주권면제 원칙을 적용하지 않은 한국 법원의 판단이 옳은지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됐는지(일본은 ‘해결됐다’, 한국은 ‘해결되지 않았다’는 입장) △2015년 12·28 합의와 같은 정부 간 합의의 유효성을 어떻게 생각할지 등을 둘러싸고 치열한 법리 다툼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또 판결 결과에 따라 양국 모두에 국내적 후폭풍이 불가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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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법원의 판결이 나온 8일 남관표 주일 한국대사가 일본 외무성에 물려와 항의를 받은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도쿄/교도 연합뉴스
한국 법원의 판결이 나온 8일 남관표 주일 한국대사가 일본 외무성에 물려와 항의를 받은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도쿄/교도 연합뉴스

한국 정부가 일본의 제안을 거부한다면 남는 대안은 세 가지이다. 일본은 이 판결에 대한 항소 등을 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어 판결은 1심으로 확정된다. 이 경우 판결을 어떻게 이행할 것인가가 향후 과제로 남는다.

첫째, 외교부가 12·28 합의를 통해 만들어진 화해치유재단에 일본이 출연한 돈(약 108억원) 가운데 남은 돈(50여억원)으로 이 판결을 이행할 수 있는지 일본 정부를 상대로 협의에 나설 가능성이다. 정부는 이번 판결이 나온 8일 외교부 대변인 논평에서 “정부는 2015년 12월 한일 정부 간 위안부 합의가 양국 정부의 공식 합의라는 점을 상기함”이란 구절을 넣었다. 한국 정부가 12·28 합의에 대해 언급한 것은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2018년 1월 “피해 당사자인 할머니들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2015년 합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진정한 문제 해결이 될 수 없다”고 밝힌 뒤 사실상 처음이다. 하지만 화해치유재단이 해산된 뒤 남은 돈을 판결 이행에 사용해도 된다고 하는 것은 판결을 인정한다는 말이어서 일본이 동의할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한국 정부가 일본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 돈으로 판결을 이행하려 한다면 심각한 외교 마찰이 불가피하다.

두번째 대안은 판결의 강제집행이다. 일본 정부는 “이 판결에 결코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이어서, 판결을 이행하려면 일본 정부의 국내 자산을 찾아 압류·매각해야 한다. 앞선, 2018년 10월 강제동원 관련 대법원 판결 때도 원고인단이 일본 민간기업 국내 자산에 대한 강제이행 절차를 진행해 2019년 큰 마찰을 빚었다. 이번엔 상대가 정부인만큼 ‘단교’에 버금가는 심각한 외교 마찰이 예상된다. 게다가 주한 일본대사관 등 외교자산은 외교관계에 대한 비엔나협약 22조에 따라 ‘강제집행’할 수 없어, 다른 재산을 찾아내야 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고려할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다.

셋째 대안은 장기 대치다. 판결이 확정됐지만, 집행하지 못한 채 장기 과제로 남겨두는 것이다. 이 경우 지난 8일 판결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법적 책임을 인정한 한국 법원의 첫 판단이라는 ‘상징적 판결’로 남게 된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