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의장님, 각국 정상 여러분, 특히 일본의 스가 총리님 반갑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14일 청와대에서 화상으로 진행된 ‘아세안+3 정상회의’의 머리발언에서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를 콕 집어 부르는 이례적인 모습을 연출했다. 이날 회의에 아세안 10개국 정상과 리커창 중국 총리 등이 참석했지만, 유독 스가 총리에게만 개별 인사를 건넨 것이다. 문 대통령은 ‘아세안+3 정상회의’와 15일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서명식을 통해 이틀 연속 스가 총리와 화상으로 얼굴을 마주했다.
스가 총리를 호명한 문 대통령의 ‘개별 인사’를 두고 한-일 관계 개선을 모색하자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란 분석이 이어진다. 한-일 관계를 개선하려는 정부의 노력은 독특한 역사 수정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며 한-일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갔던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퇴장과 함께 시작됐다. 문 대통령은 지난 9월24일 후임인 스가 총리와 첫 전화회담에서 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언급했지만, ‘아베 외교의 계승’을 내건 스가 총리는 “한국에 적절한 대응을 강하게 요구해가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후 정부는 연내 한국에서 예정된 한-중-일 3개국 정상회의를 통해 관계 개선의 기회를 찾으려고 했지만, 일본은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과 관련해 ‘압류된 일본 기업 자산을 현금화하지 않겠다’는 한국 정부의 약속 없이 참석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분위기가 다시 바뀐 것은 8일 한-미-일 3국 협조를 중시하는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이 미국 대선에서 ‘승리 선언’을 한 뒤였다. 한국은 박지원 국가정보원장 방일(8~11일), 한-일 차관 전화회담(12일), 김진표 한일의원연맹 회장 방일(12~14일) 등을 통해 내년 도쿄올림픽 성공 개최를 매개로 한-일 협력의 계기를 찾아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일본은 원칙적으로 동의하면서도, “관계 개선의 계기를 한국 쪽이 만들어야 한다”는 기본 입장에서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하지만 한·일 모두 관계 개선을 원하고 있다. 한국은 내년 1월 말 바이든 미 행정부 출범과 함께 제2기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가동시켜야 하는 입장이다. 한-일 협력을 통해 도쿄올림픽을 제2의 평창 같은 ‘평화올림픽’으로 만든다면, 2018년처럼 남북 대화와 북-미 핵 협상이 급물살을 타는 기회를 기대할 수 있다. 일본도 올림픽의 성공 개최와 이를 계기로 역대 일본 정부가 ‘국정 최우선 과제’로 삼아온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을 바라고 있다. 스가 총리는 지난 5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올림픽 기간에 도쿄를 방문하면 만나겠냐는 질문에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답했고, 14일 아세안+3 화상회의에서도 김 위원장과 “조건 없이 직접 만나겠다”는 뜻을 다시 밝혔다.
남은 문제는 양국 정상의 결단이다. 일본이 정상회담에 조건을 내세우는 강경 자세를 바꾸지 않고, 한국도 ‘정부가 사법절차에 개입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전략적 결단을 미룰 경우 모처럼 생겨난 대화 분위기가 일시에 꺼질 수도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정부가 말해온 ‘피해자 중심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는 “정부가 의사 결정을 내릴 때 피해자들에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등 문제 해결 과정에 (피해자들을) 참여시키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길윤형 서영지 기자 charis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