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훈
통일외교팀장

열여섯 꽃다운 나이, 1939년 바닷가에 ‘바래’(조개잡이) 나갔다가 일본군에 끌려갔다. 봄볕 받아 세상에 나온 뒤로 관당마을(경남 남해군 고현면)을 떠나본 적이 없는 소녀다. 6년간 만주와 상하이의 ‘위안소’를 떠돌았다. 소녀의 해말간 꿈은 산산조각 났다. 함께 끌려간 사촌동생은 일본군 총에 맞아 죽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지옥에서 풀려났다. 고향마을로 바로 가지 못했다. ‘그동안 어찌 살았냐’고 물을까 무서웠다. 식구들한테 상처주고 싶지 않았다. 3년 뒤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왔다. ‘지옥에서의 6년’은 아무도 모르게 가슴에 묻었다. 억척스레 살았다. “너무너무 아기를 갖고 싶었어. 그런데 가질 수가 없잖아. 34살 때였나, 고아원에서 아기를 세명 데려와 키웠지.” 그렇게 1남2녀를 살뜰히 보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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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여성가족부에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했다. 아흔살 때다. 손주들까지 공부를 마쳤으니 ‘이제 진실을 밝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평생 그러했듯이 몸을 부지런히 놀렸다. 2014년부터 ‘할머니 들려주세요’라는 ‘찾아가는 강연’을 하러 지역 학교에 많이 갔다. “일본 나라에 빳빳하게 고개 들고 살아야 한다. 나라 없는 백성이 얼마나 불쌍한지 모를 거다. 공부 열심히 해서 튼튼한 나라를 만들어라.” 돈이 없어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한테 해마다 장학금을 줬다.

해방·광복 70돌인 2015년의 “세계 ‘위안부’ 기림일”인 8월14일 남해여성능력개발센터 앞에 ‘평화의 소녀상’이 들어섰다. 남해군청은 그곳을 ‘숙이공원’이라 이름 붙였다. 몸이 아파 가지 못했다. 그러다 생일인 올해 5월20일 처음 가봤다. “니가 숙이가? 내도 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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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숙이. 열여섯에 바래하다 일본군에 끌려간, 지금은 구순을 넘긴 할머니가 된 그 소녀다. “좋다, 좋다, 참 좋다, 오늘은 내 평생 가장 기억될 만한 날이다.” 지난해 8월15일엔 할머니를 인터뷰한 다큐멘터리 영화 <마지막 눈물>이 뉴욕·도쿄·난징·상하이에서 동시 상영됐다. 화면 속의 할머니가 당부한다. “나를 위안부라 부르지 말아요. 할머니라고 불러줘요.”

2016년 12월6일 오후 8시40분, 무자비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이겨졌으되 단 한순간도 존엄을 잃지 않으려 애쓴 박숙이 할머니가 영면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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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옥이(2월15일), 김경순(2월20일), 공정엽(5월17일), 이수단(5월17일), 김○○(6월22일), 유희남(7월10일). 이 이름을 아는가?

박근혜 정부와 아베 신조 일본 정부가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이라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강제 봉인’하려 한 12·28 합의 발표 뒤 숨진 피해자 할머니들이다. ‘사죄 편지’는 “털끝(毛頭)만큼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아베 총리와 12·28 합의를 두고,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는 처지다.

이제 서른아홉 분만 살아 계신다. 모두 구순 언저리를 맴돈다.

박숙이 할머니는 숨을 멈추기 전에 “숙이공원 아래 묻어줘요”라고 당부했다. 할머니는 고향 바다를 굽어보는 언덕의 소녀상으로 ‘역사’가 됐다. 그리고 17일 경남 산청 간디마을학교 교정에 ‘간마 소녀상’이 세워졌다. 소녀상 제막식의 이름은 ‘이제는, 영원한 봄’. 아이들이 외친다. “할머니들께서 잃어버리신 봄, 늘 봄인 우리들이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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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동 할머니의 말씀이 귓가를 맴돈다. “우리 뒤에는 자라나는 젊은이들이 있으니 이들을 믿고 끝까지 싸우겠다.” 할머니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들도 포기하지 않는다.

noma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