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13일 평양 여명거리 준공식이 끝난 뒤 주민들이 새로 건설된 아파트 등을 바라보고 있다. 평양/로이터 연합뉴스
2017년 4월13일 평양 여명거리 준공식이 끝난 뒤 주민들이 새로 건설된 아파트 등을 바라보고 있다. 평양/로이터 연합뉴스

2017년 4월13일 평양 여명거리 준공식.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테이프 커팅을 하는 모습이 근접 포착된 영상·사진이 세계에 타전됐다. 여명거리는 평양시 대성구역 금수산태양궁전에서 영생탑에 이르는 길이 3㎞, 왕복 8차선 도로. 82·70·55·50·45층 초고층 아파트 40동과 공공건물 60동이 새로 들어섰다. 270m 높이의 82층 아파트는 북한에서 류경호텔을 빼고는 가장 높다. 북한 10대 고층 건물 중 5곳이 여명거리 아파트다. “70층짜리 살림집을 지어본 경험은 없다”는 ‘여명거리 건설지휘부 일꾼 김진성’의 고백(<금수강산> 2016년 7월호)이 괜한 엄살이 아니다. “사회주의 문명의 이상 거리”(박봉주 총리)라거나 “노동당 시대의 선경”(<노동신문>)이라 불린다.

김 위원장의 발기로 2016년 3월18일 착공해 1년여 만인 2017년 4월13일 완공됐다. “빨리빨리”라면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의 대형 건설사도 불가능한 속도전이다. 북한의 잇단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유엔·미국의 제재 강화가 뒤엉켜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던 때다. 더구나 김정은 위원장의 집권 이후 평양에서만 창전거리(2012년), 은하과학자거리(2013년), 위성과학자주택지구(2014년), 미래과학자거리(2015년), 여명거리가 잇따라 조성됐다. 한국전쟁 뒤 평양이 계획도시로 재건되고 나서 당국 차원에서 추가 조성한 14개의 거리 중 5개가 김 위원장 집권기에 건설됐다.

제재 강화에 따른 자재 부족과 경험 부족 등을 딛고 전례없는 공기 단축을 가능케 한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1970년대 이후 북한 경제를 망친 주범으로 꼽히는 김정일식 속도전일까? 비밀을 풀 열쇠는 ‘돈주’한테 있다. 북한 경제 전문가인 양문수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돈주들이 없으면 국가 건설 과제 수행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북한의 현실”이라고 짚었다. 돈주는 특히 북한에서 구할 수 없거나 부족한 건축 자재의 조달을 책임진다. “돈주의 자본력과 중국으로부터 신속한 자재 조달 능력이 없다면 공기 단축은 불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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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13일 평양 여명거리 준공식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테이프 커팅을 하는 모습을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사진. 평양/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2017년 4월13일 평양 여명거리 준공식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테이프 커팅을 하는 모습을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사진. 평양/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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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동 방식은 이렇다. 국책 건설 과제가 당·내각·군대에 할당된다. 각 기관 책임자들은 ‘돈주’를 섭외해 공사를 맡기며 특혜를 약속한다. 돈주들은 투자금보다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게 일부 건물 사용권을 넘겨받는 등의 ‘계약’을 한다.

김정은 시대 국책 건설 사업의 실체는 민자 유치 사업이자 민관 합작 사업이다. 다만 법적으론 ‘민간 건설업체’가 존재할 수 없으니, 돈주의 구실은 합법이 아니다. 계약의 법적 효력도 없다. ‘민간 유휴자금’ 유치는 권장되지만, ‘사용권’(사실상 소유권)을 돈주한테 주는 건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투자금을 떼이거나 ‘불법 유착’으로 감옥에 가지도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투자 규모가 크고 권력과 가까운 돈주는 ‘노력영웅’ 칭호·훈장, ‘김정은 표창장’을 받기도 한다. 합법도 불법도 아닌, 회색지대에서의 공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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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시대 들어 회색지대가 빠르게 넓어지고 있다. 국영기업과 돈주의 공생도 다양한 분야로 확산하고 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중국 무역업자가 가발 1만개를 한달 안에 납품해달라고 북한 무역회사에 주문한다. 무역회사는 산하 공장에서 1천개를 생산하고, 나머지 9천개는 돈주들이 주도하는 생산자 네트워크에 넘긴다. 돈주들은 평소 거래하던 국영기업에 돈을 주고 생산을 주문한다. 결국 국영기업이 돈주의 주문에 따라 임가공업체 노릇을 하는 셈이다.

돈주가 국영기업의 명의를 빌리거나 그에 더해 공장 건물과 기계설비 사용권까지 얻어 생산자 노릇을 하기도 한다. 법적으로 생산수단 사유는 허용되지 않지만 현실은 다르다. 양문수 교수 등이 2015년 탈북민을 대상으로 국영업체에 개인(돈주)이 투자하거나 직접 운영하는 비율을 조사해보니 식당 64.1%, 상점 56.2%, 지방산업공장 26.2%, 중앙공업공장 21.7%였다. 그만큼 ‘타인 노동을 부리는 개인 사업자’의 성장, 곧 사실상의 ‘기업 사유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안팎이 다른 ‘무늬만 국영’의 확산은, 김정은 위원장의 ‘우리식 경제관리방법’과 ‘사회주의 기업 책임관리제’에 따른 ‘기업 자율권 확대’ 정책과 ‘시장화 진전’이 화학반응을 한 변화다. 자본주의 경제처럼 경쟁이 격화해 격차가 발생한다. 예컨대 ‘황금벌상점’(2014년 12월 개점)의 책임자는 공공연히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 다른 상점보다 봉사(영업) 시간을 연장하고, 가격을 합리적으로 책정했으며 품질을 감독한다”고 ‘차별성’을 강조한다. 국영기업인 황금벌무역회사가 (명목상) 운영 주체다. 남쪽의 대형 마트처럼 ‘저가수매-저가판매’라는 일종의 박리다매 전략을 앞세운 황금벌상점은 평양 보통강구역과 중구역 등에 동시다발로 매장을 연 뒤 ‘봉사망’을 점차 넓히는 최초의 ‘북한판 편의점 체인’이다. ‘소비자 취향 저격’은 이제 북한에서도 필수 과제다.

양문수 교수는 돈주들과 손잡고 빠르게 변신하는 이런 국영기업들을 “‘붉은 모자’ 또는 ‘사회주의 모자’를 쓴 기업”이라 불렀다. 이는 중국의 개혁개방 초기 성장 동력이던 농민 개인 또는 집단 소유의 ‘향진기업’에서 발생한 현상과 유사하다. 향진기업은 중국 농촌에서 농민이 설립한 ‘(공업·운수·서비스업 등) 비농업부문 비국유기업’의 총칭이다.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