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살면서 가보기 어려운 곳, 쉽사리 보기 어려운 풍경을 만나면 일쑤 ‘증명사진’을 찍습니다. 별로 폼나는 사진이 아닌데도 기를 쓰고 찍죠. ‘나 여기 왔다갔다’ 뭐 이런 거겠죠.

‘증명사진’ 찍기와 관련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아주 특별한 곳입니다. 평생 한번 가볼까 말까 한 곳, 어찌어찌 해서 가게 되더라도 다음에 언제 또 갈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곳. 그래서 북에 가는 분들은 엄청나게 사진을 찍습니다. 발길 닫는 모든 곳, 눈에 걸리는 모든 풍경을 카메라나 캠코더에 담고 싶어하죠.

한해 국외 출국자가 1천만명(연인원 기준)을 넘어선 요즘, 여권이 없는 분은 그리 많지 않죠. 인천공항에서는 함께 여행 떠나는 분들이 여권을 꺼내놓고 누구 여권에 ‘도장’이 많이 찍혔는지 서로 세며 경쟁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될 때가 가끔 있습니다. 국제공항을 통과할 때면 예외없이 찍게 되는 입출국 승인을 표시하는 도장 말입니다. 사람들의 흔적 남기기 감정의 측면에서 보자면, 여권의 이런 도장도 ‘증명사진’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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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이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유일한 국제공항인 평양 순안공항에선 입출국 수속 때 도장을 찍어주는 일이 없습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증(비자)에만 도장을 찍고, 여행객이 갖고 있는 여권에는 도장을 찍어주지 않습니다. 사증이라는 것도, 다른 나라는 여행객이 갖고 있는 여권에 붙여주는 게 일반적인데, 북녘에선 그렇지 않습니다.

북한은 사증이 있어야 입출국이 가능한 나라입니다. 보통은 중국 베이징이나 선양에 있는 북한 영사관에서 한 장 짜리 사증을 받습니다(사진 참조). 북한 영사관에서 여행객의 여권에 사증을 붙여주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행객이 북한에서 용무를 다 보고 출국할 때, 북쪽에선 여행객에게 발급했던 한 장 짜리 사증을 예외없이 회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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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결국 여행객의 여권에는 북녘을 다녀왔다는 흔적이 전혀 없게 되는 셈입니다.

이 때문에 평양을 오간 많은 분들이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십니다. “아니, 여권에 도장은 왜 찍어주지 않는 거야? 비자는 또 왜 다 빼앗아가고? 난 뭘로 평양에 다녀왔다는 걸 입증하라는 거지?” 순안공항 출입국 통관지역을 빠져나오며 투덜거리는 분들, 많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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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분들은 이러십니다. “내 참, 폐쇄적이라고 하더니, 별 게 다 이상하네. 이거야 원 참….”

아마도 평양을 다녀온 많은 분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실 겁니다. 북한은 여러모로 참 이상한 곳이라고.

저도 2000년 10월 평양을 처음 다녀왔을 때, 여권의 도장 문제와 사증 회수 문제가 참 의아했습니다. 곰곰 생각했죠. 그리고 북녘 문제에 전문적 소견을 갖고 계신 분들께 기회 있을 때마다 묻기도 했습니다. 딱히 정설이랄 것은 없었습니다. 북쪽에서 이 문제와 관련해 설명한 게 없으니 어쩜 당연한 일이죠. 순안공항에서 입출국 수속을 하는 분들께 물어보기도 했지만, 빙긋 웃고 말거나,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더군요.

여기서 잠깐 다른 얘기를 해야겠네요. 9·11 이후 미국에 다녀오시거나, 아니면 이스라엘에 가보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공항 검색대를 지키는 사람들이 참 무섭죠. 신발도 벗기고, 윗도리도 벗기고, 때론 혁대도 풀라고 하고, 가방 속도 샅샅이 뒤지고, 그때의 모멸감이란…. 아랍쪽 여행객에 대한 검색은 아시아쪽 여행객에 비해 훨씬 심하죠. 2003년 여름 이스라엘 출장을 다녀올 때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는 데만 1시간이 넘게 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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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드나든 흔적이 있는 여권을 지닌 사람이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등의 나라를 가게 되면 공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한번 상상해보시죠. 아시다시피, 아메리카합중국(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은 북을 ‘악의 축’이라고 지칭랬죠. 미국 국무부는 해마다 펴내는 세계 인권보고서에서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규정하고 있기도 합니다. 아마도, 틀림없이, 북과 인연이 있음이 여권을 통해 확인되는 여행객은 공항 통과가 상당히 팍팍할 겁니다. 저는 이 대목을 주목합니다.

물론 북쪽 출입국 당국이 여행객의 여권에 도장을 찍어주지 않고, 사증도 여권에 붙여주지 않고 모두 회수하는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거기엔 아직 국제기준과 차이가 나는 일종의 ‘폐쇄성’도 부분적으로 작용하고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가장 큰 이유는 ‘국제적 고립을 고려한 여행객 편의 보호’ 측면에 대한 고려가 아닐까 추정해봅니다. 북녘을 드나든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음으로써, 그 여행객이 다른 나라를 여행할 때 불필요한 어려움을 겪지 않게 하려는 것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