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은 정치권의 해묵은 화두다. 현행 헌법을 손질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정치권에 상당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첫해인 2008년에는 “개헌은 대선을 치르면서 여야 간에 공감대가 이뤄진 문제”라며 “개헌 논의 시작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말했다. 대선 기간인 2012년 11월6일 정치쇄신공약 발표 기자회견에서는 “집권 후 4년 중임제와 국민의 생존권적 기본권 강화 등을 포함한 여러 과제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고 국민적 공감대를 확보해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되는 개헌을 추진해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지난 6일 신년 기자회견에서는 개헌을 ‘블랙홀’에 비유하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박 대통령은 개헌 공약에서도 또다시 말을 뒤집고 나선 셈이다.
1987년에 만들어진 현행 헌법은 그동안의 급속한 시대 변화에 따라 역사적 수명이 다해 보완과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 개헌론의 요체다. 특히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와 여야의 극단적 대립 등 현행 권력구조의 문제점이 부각되면서 우리 정치문화에 더 적합한 정부 형태를 찾아야 한다는 데 많은 사람이 동감을 표시하고 있다. 단지 권력구조 개편만이 아니다. 국민의 기본권 확대, 경제 민주화, 진정한 지방분권의 구현, 통일에 대비한 법적 토대의 구축 등 다양한 대목에서 손질을 가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물론 개헌이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일거에 해결해주는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권력구조만 해도 대통령중심제와 내각책임제, 이원집정부제 등 각각의 정부 형태는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다. 어느 특정 권력구조가 한국 정치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해법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개헌이라는 해묵은 과제를 무작정 미루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 듯하다.
개헌 논의에서 첫째로 중요한 것은 시기다. 대통령 임기 말로 갈수록 개헌 추진 동력이 떨어지고 개헌 논의 자체가 정략적으로 흐르기 쉽다. 차기 대통령 선거가 가까워지고 각 정당에서 후보 간 경쟁이 시작되면 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개헌 방향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와 여론 수렴, 국회 차원의 논의, 국민적 합의 등 일정을 고려하면 더 늦기 전에 올해부터는 개헌 논의를 시작해야 할 상황이다.
박 대통령이 개헌 논의 불가의 이유로 내건 경제와 민생은 결코 구실이 될 수 없다. 언제는 민생이 중요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는가. 민생과 개헌은 우선순위의 문제가 아니라 필요하다면 함께 병행해야 할 과제다.
개헌과 관련해 또 하나 유의해야 할 대목은 논의 주체의 확대다. 정치인들만이 참여하는 ‘그들만의 개헌 논의’가 아니라 시민사회를 포함한 더 많은 국민이 개헌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그래야 개헌 이슈의 협소성과 편협성을 극복하고 논의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 박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이런 논의의 확장을 통해 공동체적 합의를 이끌어내도록 물꼬를 트는 일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나서서 정치권 논의부터 봉쇄해버리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박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새누리당 친박계는 일제히 “개헌보다는 국민이 먹고사는 경제를 살리는 데 우선 과제를 두어야 한다”고 박 대통령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 이런 권위주의 행태를 없애기 위해서도 개헌이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제는 청와대와 정치권이 개헌 문제를 더 진지하고 적극적으로 검토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