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자 신분으로 주요국 공관장에 임명돼 큰 파문을 일으킨 이종섭 주오스트레일리아(호주)대사가 29일 사임했다. ‘수사 회피’ 논란에도 불구하고 대사에 임명된 지 25일 만이다.
이 대사는 이날 오전 자신의 변호인을 통해 사의 표명 사실을 알렸다. 외교부는 임명권자인 윤석열 대통령에게 보고해 이를 수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전날까지도 임명 철회 가능성을 일축하던 정부 태도가 급변한 건 여당의 총선 패배 위기감 때문이다. 이 대사가 급조된 공관장 회의 참석을 핑계로 조기 귀국했음에도 민심이 들끓자 ‘악재’ 해소 차원에서 거취를 정리한 것이라고 본다.
국민의힘은 기다렸다는 듯 “민심 순응” 운운하며 과대 포장에 나섰다. 그러나 이 대사 임명을 둘러싼 의문은 하나도 해소된 게 없다. ‘해병대 채 상병 순직 사건’에 연루된 핵심 피의자를 대사로 발탁한 것부터가 인사 관례와 상식에 어긋난다. 정부는 “방산 협력을 위해서”라고 했으나, 왜 굳이 국방부 장관 출신이어야 하는지, 굳이 피의자를 임명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제대로 답변한 적이 없다. 이 대사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출국금지 대상임에도 4시간 약식 조사만 받고, 법무부가 서둘러 출금을 해제하자마자 곧바로 출국했다. 쫓기듯 허겁지겁 임명하고 내보낸 것이다. 주재국에 제출해야 하는 신임장조차 복사본을 들고 나갔다.
이 대사는 보통 피의자가 아니다. 국방부 장관 시절 경찰에 넘긴 해병대 채 상병 순직 사건 관련 기록 회수를 지시하는 등 조사에 부당 개입한 혐의(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를 받고 있다. 자신이 결재한 것을 갑자기 번복한 것이다. 이런 지시를 하기 직전 대통령실 유선전화를 받은 사실도 이미 드러났다. 국방부 장관에게 그런 지시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겠나. 이 대사 졸속 임명이 ‘도피성 출국’이란 의혹을 살 수밖에 없는 근본 이유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은 이날 이 대사의 사의만 수용했을 뿐, 그간의 자초지종에 대해선 아무런 말이 없다. 이미 국민적 의혹으로 더 키운 이 사안이 침묵한다고 없어지나. 또 25일 만의 대사 교체를 호주에는 뭐라고 설명할 텐가. 유례없는 외교적 결례가 아닐 수 없다. 당장 5월 말로 잡혀 있는 ‘한-호주 외교·국방 2+2 회의’ 준비에도 차질이 우려된다.
이 모든 사달은 윤 대통령 스스로 만든 것이다. 대사 사퇴로 얼버무리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직접 임명에서 사퇴에 이르는 저간의 과정을 설명하고 국민에게 사과해야 마땅하다.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최소한의 도리는 해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