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설.칼럼칼럼

[세상읽기] 정책과 공약이 하는 일 / 김만권

등록 :2021-04-12 04:59수정 :2021-04-12 10:34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기원전 64년 로마 공화정 말기, 뛰어난 변호사이자 탁월한 웅변술을 가진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제1집정관 후보로 출마했다. 지방의 부유한 지주가문 출신, 20대부터 스토아와 그리스 철학에 정통한 이상주의자, 법률가로서 훌륭한 경력, 30대에 이미 원로원에 입성한 정치 이력. 출마 당시 마흔두살이었던 키케로는 누가 보아도 경험과 철학을 모두 갖춘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집정관 후보였다. 유일한 단점은 중앙 귀족 출신이 아니라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키케로가 이 선거에서 싸워 이기기엔 너무 정직한 인물이라 생각한 이가 있었다. 바로 키케로의 동생 퀸투스 키케로다. 퀸투스가 볼 때 마르쿠스가 중앙 귀족 출신이 아니란 사실은 너무 결정적이었다. 게다가 귀족과 고위 행정관들의 부패 속에 몰락하고 있는 공화정에서 형이 품은 고귀한 이상주의로 선거에 이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마르쿠스가 선거에 이기려면 현실적 조언자가 필요했다. 퀸투스는 그 역할을 직접 맡기로 결심했다. 퀸투스는 말로 조언하는 대신 작은 책자를 썼다. 여기에 형이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현실적 전략을 명료히 정리해 담았다. 세계 최초의 체계적인 선거 전략서는 이렇게 로마에서 탄생했다.

그렇다면 이 최초의 선거 전략서엔 어떤 이야기가 담겼을까? 일반적 상식과 달리 퀸투스가 선거에서 먼저 주목한 건 경쟁자가 아니라 유권자와 지지자들의 특성이었다. 선거에선 경쟁자가 누구인지보다 유권자와 지지자가 누구인지가 더 중요하다. 이기고 싶다면 이 집단이 갖는 고유한 특성을 파악하고 그 안에 내재해 있는 약점을 이용해야 한다. 이런 발상 아래 퀸투스가 제시한 조언은 크게 다섯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유권자와 지지자들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라도 그렇게 할 것이라 약속하라. 유권자는 약속을 깨는 이보다 약속을 거절하는 후보자에게 더 화를 낸다. 둘째, 과거에 은혜를 베푼 사람들이 있다면 지금이 부탁할 시기다. 주저 말고 이들에게 지지를 부탁하라. 셋째, 성추문을 비롯해 경쟁자의 약점을 파악하고 모두에게 알려라. 유권자는 이에 반응한다. 넷째, 유권자들에게 부끄러워하지 말고 아첨해라. 손을 잡고, 눈 맞추고, 문제를 들으며 지지를 호소하라. 다섯째, 유권자들에게 무엇인가가 이루어질 것이란 희망을 전달하라.

이렇듯 유권자와 지지자들의 취약한 부분을 공략하는, 현실적 조언으로 가득한 이 작은 책자는 ‘선거에서 이기는 법’을 담은 전략서로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선거에 나서는 이들에게 여전히 중요한 지침서가 되고 있다. 실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12년에 재선을 위한 선거에 나서며 모든 참모진과 함께 이 책자를 읽었다고 한다. 그의 조언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4·7 재보궐선거가 막을 내렸다. 이번 선거만 보자면 퀸투스의 세번째 조언이 단연 눈에 띈다. 요즘 표현으로 네거티브가 난무했다. 선거에서 네거티브가 그 자체로 나쁜 건 아니다. 후보의 자질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상대방의 약점을 파고드는 네거티브는 어느 정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 수위다. 그 수위를 알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유권자들이 후보자들의 정책과 공약을 파악하고 있는지 보는 것이다. 상대방의 약점을 파고드는 네거티브가 그 도를 넘으면 후보자들이 내놓는 정책과 공약이 보이지 않는다.

정책과 공약이 중요한 까닭은, 퀸투스의 다섯번째 조언, 바로 유권자들에게 전달해야 하는 희망의 내용이 여기에 담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책과 공약이 없는 선거는 다름 아닌 희망이 없는 선거다. 기본적으로 선거에 이기고자 만드는 정책과 공약은 많은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공적 이익을 폭넓게 담아야 한다. 이런 이유로 정책과 공약이 풍부한 선거에선 패자에게도 희망이 남는다. 반면 정책과 공약이 부재한 선거에선 승자와 그 지지자들의 기쁨만 남는다. 문제는 그 기쁨조차 순간적이라는 데 있다. 기쁨이 지속될 구체적 계획이 없기 때문이다.

정치가 거짓과 사기, 배신으로 가득한 곳임을 상기시키며 거침없이 현실적 조언을 했던 퀸투스조차 이렇게 썼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것이야말로 선거 캠페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선거가 지나간 자리엔 승자와 패자 대신, 앞으로는 ‘모두가 더 나아질 것’이란 희망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정책과 공약이 하는 일이다.
한겨레와 함께 걸어주세요
섬세하게 세상을 보고
용기있게 기사를 쓰겠습니다.

광고

광고

광고

사설.칼럼 많이 보는 기사

[이상헌의 바깥길] 30년의 다짐, 넌 무얼 했느냐 1.

[이상헌의 바깥길] 30년의 다짐, 넌 무얼 했느냐

[편집국에서] 사라진 ‘외교행낭’을 찾아서 / 이주현 2.

[편집국에서] 사라진 ‘외교행낭’을 찾아서 / 이주현

인공지능의 신냉전 시대? 3.

인공지능의 신냉전 시대?

[아침햇발] 대전환 시대, ‘2진법 외교’를 넘어/박민희 4.

[아침햇발] 대전환 시대, ‘2진법 외교’를 넘어/박민희

[사설] 팔레스타인과 미얀마, 미국과 중국의 ‘이중잣대’ 5.

[사설] 팔레스타인과 미얀마, 미국과 중국의 ‘이중잣대’

한겨레와 친구하기

NativeLab : PORTFOLIO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Weconomy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오피니언
만화 | ESC | 토요판 | 한겨레 데이터베이스 | 뉴스그래픽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더나은사회 | 탐사보도 | 서울&
스페셜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사업

맨위로
의 마음이 번집니다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마음,
환경을 염려하는 마음,
평등을 지향하는 마음...
당신의 가치를 후원으로 얹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