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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프리즘] “ㅂㄱㅅㄱ 왜 하죠?” / 이정연

등록 :2021-04-04 18:09수정 :2021-04-12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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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연 ㅣ 젠더데스크 겸 젠더팀장

“ㅂㄱㅅㄱ 왜 하죠?”

현수막이 나붙었다. 누구나 다 아는 암호가 담겼다. ‘ㅂㄱㅅㄱ’은 ‘보궐선거’를 뜻한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사건의 피해자를 지원하는 ‘서울시장 위력성폭력사건 공동행동’(공동행동)이 서울 시내 곳곳에 붙인 현수막이었다. 이들이 누구나 다 알 만한 암호를 담은 사정은 이렇다. ‘보궐선거 왜 하죠?’를 담아 현수막을 제작하면 공직선거법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서울시 선거관리위원회가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난달 23일 공동행동은 기자회견을 열어 ‘보궐선거 왜 하죠?’라는 문구를 통해 보궐선거의 의미를 되새기는 캠페인을 진행하려 했지만, “서울시 선관위가 공직선거법 제90조 등에 따라 이 문구는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고 밝혔다.

서울시 선거관리위원회의 판단은 오히려 선거에 영향을 미친 셈이 됐다. 나 같은 유권자는 공동행동이 외치고자 했던 질문에 스스로 답하는 시간을 갖게 됐다. 유력 후보자 간의 폭로전, 알맹이 없는 공약 선전전 사이에서 유권자가 꼭 확인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살펴볼 기회를 줬다. 4·7 보궐선거를 치르게 된 이유는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두 전임 시장의 권력형 성범죄 사건 때문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이번 보궐선거의 의미를 아무리 깊숙이 어딘가에 찔러 넣어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다. 유력 후보자와 그들이 속한 정당끼리 하루도 끊이지 않고 정쟁을 이어가고 있지만, 결코 잊을 수가 없다.

한국여성민우회 트위터 갈무리
한국여성민우회 트위터 갈무리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나선 후보자 12명의 선거 공보물을 책상 위에 놓고 펜을 들었다. 여성단체들은 기호 1번 후보와 기호 2번 후보의 공보물에 ‘성평등’, ‘성폭력 대책’ 등과 같은 단어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지적했는데,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설마’ 하는 마음과 ‘그래도 하나쯤’이라는 기대는 괜한 것이었다. 1, 2번 후보 온·오프라인 공보물 어디에도 ‘성평등’ 등의 단어는 없었다. ‘여성’이라는 단어는 여러 차례 발견했지만, 모두 안전 및 경제 취약 계층인 ‘여성’, 돌봄 주체인 ‘여성’을 대상으로 한 공약에 제시될 뿐이었다.

유력 후보자의 공보물 어디에서도 성평등한 서울을 어떻게 만들겠다는 건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속 시원한 답은 성평등을 전면에 내세운 후보 5명의 공보물에서 찾을 수 있었다. 기호 6번 신지혜(기본소득당), 8번 오태양(미래당), 11번 김진아(여성의당), 12번 송명숙(진보당), 15번 신지예(무소속·팀서울) 후보. ‘페미니스트 서울시장’이 되겠다고 하고(신지혜 후보), ‘소수자청’ 신설을 공약했으며(오태양 후보), ‘여자 혼자도 살기 좋은 서울’을 만들겠다고 하고(김진아 후보), 서울형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 실업수당 지급을 내세웠으며(송명숙 후보), 부시장에 모두 여성을 임명하고 시장의 권력 분산에 역점을 두겠다고 했다(신지예 후보). 보궐선거를 하는 이유, 그리고 보궐선거 뒤에도 계속 찾아야 할 답은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지난 2일 박영선 후보 쪽은 ‘성평등 서울’을 선언하며 여성 분야 공약을 더 내놓았다. 박 후보의 공약에서 ‘성평등 철학’을 확인할 수 없었다는 문제 제기에 대한 답이었을까? 박 후보 캠프에서 여성인권특별위원장을 맡은 권인숙 의원은 이날 “왜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치러지는지 뼈아프게 되새기며 박영선 후보는 이제부터라도 성심을 다해 여성과 함께 하나씩 담대하게 바꿔나갈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날 더불어민주당 내 권력형 성범죄 사건에 대해서 할 말 제대로 해온 거의 유일한 의원이었던 권 의원이 이 정책을 발표한 것을 보며 다시 속이 아렸다. 왜 박영선 후보가 직접 이 공약을 발표하지 않았을까? 그가 직접 ‘ㅂㄱㅅㄱ 왜 하죠?’에 답하는 걸 보고 싶었다. 질문을 그만둔 시민들은 외친다. ‘이제는, 반드시, 성평등한 서울을 원한다!’ 이 외침에 답할 시간이 곧 다가오고 있다.

xingx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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