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희 ㅣ 지식디자인연구소장
다행히 트럼프는 졌다. 그런데, 트럼피즘은 더 강해졌다. 트럼프의 괴상하고 미운 캐릭터 때문에 반트럼프 진영이 결집했지만, 트럼프로 상징되는 사회정치적 흐름은 더 공고해졌다. 따라서 대선은 끝났지만 진보가 성찰해야 할 과제는 무겁고 두텁다. 트럼프 현상은 진보 무능의 결과다. 진보가 미국 사회를 어떻게 개혁할지에 대한 사회경제적 비전을 상실했기 때문에 초래된 현상이라는 얘기다.
“오늘날 진보 좌파에는 산업 자동화가 야기하는 대량 실업 문제를 해결할, 또는 기술 발전으로 흑인과 백인, 남성과 여성을 막론하고 모든 미국인이 겪을 수 있는 소득격차 문제를 해결할 전략이 없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진단이다. 미국을 비롯해 서구의 진보는 복지국가의 안정적 구축 등 사회경제적 개혁의 성취 뒤 경제침체 등 새롭게 제기된 각종 시대적 도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사상적으로는 신자유주의의 거친 공세에 직면했고, 그 사상으로 무장한 정치세력은 집권 뒤 거세게 밀어붙였다. 그 와중에 자본주의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강제하는 외부적 힘이던 사회주의권까지 몰락하는 상황은 진보에 심각한 위기로 다가왔고, 그들은 이 위기를 사상적·정치적 타협으로 극복하려 했다. 클린턴과 블레어가 제창한 제3의 길이 그런 시도였다.
대처와 레이건의 등장이 진보의 성공, 즉 복지국가의 안착에 따른 반작용이었다면 트럼프와 브렉시트는 진보의 실패로 초래된 재앙이었다. 미국의 클린턴이나 오바마, 영국의 블레어와 브라운은 10년 안팎으로 집권했지만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실패했다. 워낙 신자유주의 공세가 드셌기에 어느 정도의 타협은 불가피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노동자 등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편이라는 정당들이 집권했을 때조차도 살림이 나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졌다는 인식은 그들을 돌아서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진보정당의 지지 기반은 저학력·저소득 노동자에서 대졸자·중상층의 정당이 됐다. 피케티가 말하는 ‘브라만 좌파’가 된 것이다. 진보가 브라만 좌파에 만족하는 한 ‘상인 우파’를 이길 수 없다.
1929년 대공황이 발생한 다음 집권한 루스벨트는 ‘잊힌 사람들’(forgotten man)이란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정치적 다수 연합을 도모했다. 정부 정책에서 잊힌 노동자, 흑인, 도시 빈민 등의 이해를 대변하면서 그들을 정치적 동원 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구축된 질서가 뉴딜 체제다. 신자유주의의 득세 이후 정부 정책에서 버림받은 세력이 있다. 후쿠야마는 이를 ‘보이지 않는 사람들’(invisible man)이라고 했는데, 바로 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트럼프 현상의 동력이다. 보이지 않는 이들의 아픔과 분노를 재빨리 포착해 정치화한 것이 트럼프다. 따라서 이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트럼피즘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다. 우리는 트럼피즘으로부터 안전할까? 우리나라의 진보는 트럼프 현상의 등장을 저지할 정도로 유능할까? 진보정부가 추진하는 사회경제적 개혁은 아직 갈 길이 멀다. 때론 미적대고, 때론 작은 데에 매달린다. 보통사람들에게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성과가 확연하진 않다. 그럼에도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 간의 다툼에 매달려 에너지를 낭비하고, 초점을 잃고 있다. 이 대목에서 김기식의 자성은 통렬하다. “현실 정치는 그렇다 치고, 가치를 실현하는 미래 비전에서 진보는 구조적인 문제에 얼마나 스스로를 혁신하고 있는가.”
미국 진보의 실패나 무능에 ‘정체성의 정치’(identity politics)가 있다. 정체성의 정치는 흑인, 이민자, 여성, 히스패닉, 성소수자, 난민, 환경 등 다양한 소외 집단의 정체성을 보장하는 데 집중하는 정치다. 필요하고,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결과 더 많은 시민의 이해를 담보하는 사회경제적 프레임이 실종됐고, 그것이 진보의 만성적 열세를 초래했다는 지적도 흘려듣지 않아야 한다. 정체성 정치와 함께 더 크게 세상을 바꾸려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진보가 한국적 트럼프 현상을 막을 수 있다.
보수는 비사회경제적 프레임으로 승부하려 한다. 따라서 진보는 힘들어도 사회경제적 이슈를 피하거나 다른 것에 정신 팔지 말고 정면으로 붙고, 집요하게 매달려야 한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묶는 비전을 마련해야 한다. 결국, 관건은 전투에서의 승리보다는 전쟁에서의 승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