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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특권의 발견 / 이승준

등록 :2020-11-15 15:52수정 :2020-11-16 02:40

전동킥보드는 누군가에겐 ‘4차 산업’이고, 또 누군가에겐 빠르고 편한 이동수단이지만, 시각장애인들에겐 ‘지뢰’다.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서 공유형 퍼스널모빌리티 서비스로 대여한 전통킥보드를 탄 시민들이 이동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전동킥보드는 누군가에겐 ‘4차 산업’이고, 또 누군가에겐 빠르고 편한 이동수단이지만, 시각장애인들에겐 ‘지뢰’다.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서 공유형 퍼스널모빌리티 서비스로 대여한 전통킥보드를 탄 시민들이 이동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이승준 ㅣ 사건팀장

몇년 전 유아차(유모차)를 밀고 가다 ‘낯선 풍경’을 마주했다. 인도나 건물의 경사로 앞은 수많은 자동차가 가로막는다. 지하철 승강장과 열차 사이의 간격, 높낮이는 천차만별이다. 주의하지 않으면 유아차가 승강장과 열차 사이의 틈에 걸려 휘청댄다. 지하철 엘리베이터 찾아 삼만리, 혼자 다닐 때보다 이동 시간은 갑절이 된다. 원래 있던 풍경이지만 그동안 쉽게 지나쳐버린 풍경이다. 사회가 ‘비장애인, 건강한 남성’ 중심으로 설계돼 있다고 생각해왔지만, 부끄럽게도 그제야 피부로 깨달았다. ‘장애인, 몸이 불편한 이들이 사는 세상과 장애가 없는, 건강한 내가 사는 세상은 180도 다르구나.’

예전 기억을 떠올린 건 사건팀 기자의 ‘점자블록 위 불쑥…방치된 킥보드, 시각장애인에겐 지뢰’(11월5일치 10면) 기사를 데스킹(손질)하면서다. 케인(시각장애인용 지팡이)에 의지해 길을 걷는 시각장애인 최아무개(40)씨의 정강이는 검붉은 멍과 흉터가 곳곳에 있다. 점자블록 위에 아무렇게나 주차된 전동킥보드에 부딪히고 넘어지기 때문이다. 주행 소음이 없다 보니 최씨에게 쌩쌩 달리는 전동킥보드는 ‘침묵의 습격자’다. 전동킥보드는 누군가에게는 ‘4차 산업’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빠르고 편한 이동수단이지만, 최씨 같은 이들에겐 ‘지뢰’다. 길은 모두에게 똑같지만 길 위 풍경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유명한 이 문장은 그래서 매번 되새김질해야 한다. “나에게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구조물이나 제도가 누군가에게는 장벽이 되는 바로 그때, 우리는 자신이 누리는 특권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제야 사회와 공동체 구성원들은 ‘내가 누리는 특권’이 무엇인지 조금씩 깨닫고 있다. 부족하나마 절차적 민주주의를 갖춘 뒤 사회는 개별 구성원들의 ‘차이’에 주목하고, 실질적·일상의 민주주의 실현에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낯선 풍경’이 사회 곳곳에서 더 많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누군가에게는 평화로운 풍경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옥도인 풍경이 일상 곳곳에서 충돌한다. ‘작은 문제’라고 치부되던 것들이 ‘큰 문제’로 떠오른다. 제품 상자 손잡이가 그렇다. 기업이나 소비자 입장에서 상자는 상품을 보호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대형마트에서 상자를 옮기는 노동자들에게 손잡이 없는 상자는 어깨와 허리를 짓누르는 돌덩이다. 구멍을 뚫어 손잡이만 만들어도 신체적 부담을 10~40% 줄일 수 있다고 노동자들이 1년을 호소했지만 변화가 없었다.(10월30일치 2면) 100리터 종량제 쓰레기봉투는 거리의 흔한 풍경이지만, 그동안 환경미화원들에겐 허리를 망가트리는 주범이었다.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이 등장하자 정부와 기업은 부랴부랴 전동킥보드 주정차 운영 가이드라인을 발표하고, 일부 유통업체는 상자에 구멍을 뚫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100리터 봉투를 덜 무거운 75리터 봉투로 줄이는 지자체가 늘고 있다. 처음부터 노동자나 장애인을 고려한 시설을 만들고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는 교훈을 깨닫기까지 누군가 다치고, 골병을 앓아왔다는 사실은 뼈아픈 일이다. 앞으로도 이러한 문제들은 계속 발견되고, 발굴될 것이다.

그럴수록 사회는 ‘특권리스트’를 계속 업데이트하고, 불편하고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사회적 공론의 장으로 끊임없이 끌고 올 수밖에 없다. 모두 정치와 정부와 언론의 역할이다. ‘새로운 풍경’의 계속된 출현은 공동체를 더 단단하게 만들 것이다.

서울 광화문을 지나다 교보생명 사옥 외벽에 걸린 ‘광화문 글판’이 눈에 들어온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 시인과 촌장의 노래 ‘풍경’에서 가져온 문장이다. 문장을 조금 바꿔본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누구나 안전하게 길을 걷는 풍경, 아프지 않고 일하는 풍경, 다치지 않고 생업을 이어가는 풍경….’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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