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재 ㅣ 초파리 유전학자

급진주의는 위험하지 않다. 영어 래디컬로 번역되는 급진주의는 흔히 ‘극단주의’와 혼동된다. 아나키즘이 무정부주의가 아니듯, 래디컬도 극단주의가 아니다. 과학자이면서 급진주의 좌파운동에 헌신했던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의 부고에서, 리처드 르원틴은 래디컬을 “사물을 근본 뿌리부터 고려하는 것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첫 번째 원칙에 맞춰 재구성하려는 태도”라고 말했다. 즉, 래디컬은 끊임없이 본질에 대해 묻고 이를 실천의 원리로 삼으려는 태도다. 정치는 민중의 삶을 풍요롭게 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 정치는 극단적인 대립의 소모전일 뿐이다. 급진주의자는 정치의 본질을 묻고, 본질에 다가가는 전략을 제시할 것이다. 급진주의자는 위험한 인물이 아니다.

서구 정치사상사에서 가장 급진적이라고 평가되는 인물은 제러미 벤담이다. 그는 심지어 75살의 나이에도 급진주의자로 자처했고, 84살로 사망하기 전까지 급진자당의 당수로 활동했다. 벤담은 오직 사악한 사익을 추구하는 왕과 의회를 비판했고, 탐욕적인 통치자와 희생당하는 피통치자의 정세 인식 속에서 오직 민중의 옹호자를 자처했다. 그는 온건한 개혁주의자들과 차별성을 부각하며, 현실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선거 방식의 변화를 통해 썩어빠진 영국의 정치 상황을 개혁하려 했다. 급진주의 정치사상가 벤담은, 지배층의 기만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면서 언제나 기존 제도를 대체할 대안을 제시했다. 벤담은 거의 60년 동안 날마다 15페이지씩 글을 썼고, 자신을 “세상 누구보다 가장 효과적으로 자비로운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급진주의자는 결코 폭력적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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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이 모두 정치적 스승으로 여겼던 사울 알린스키는, 마피아가 설치던 1930년대의 시카고에서 도시빈민운동에 투신했던 급진주의 좌파다. 힐러리 클린턴은 졸업논문에서 알린스키의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그와의 연관성을 부정했지만, 알린스키의 조직에 직접 참여했다가 정치에 입문했던 오바마는 알린스키와의 인연을 강조하며 대통령에 당선됐다. 힐러리는 알린스키의 이론만을 취했지만, 오바마는 그의 행동원칙을 체화했고, 바로 그 점이 둘의 정치적 성공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급진주의자는 말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람이다.

알린스키는 급진주의자가 결코 “인민의 도덕적 타락과 내면의 사악함을 혐오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급진주의자는 정치가 타락한 사회에서, 대중이 고결함과 존엄성을 유지한다는 사실에 외려 감동하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인민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지 않는데, 그건 바로 인민의 태도와 행동이 악조건의 산물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심판받아 마땅한 것은 인민이 아니라, 그들을 그렇게 만든 환경이다.” 급진주의는 예수의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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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을 경멸하는 지식인과 정치세력은, 결코 급진적이지도 개혁적일 수도 없다. 디워 논란에서 조국 사태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대중을 경멸하고 무시하는 진중권의 화법과, 경멸의 정치로 일관하는 황교안은 사회에 아무런 변화도 이끌어낼 수 없다. 급진주의자에겐 사심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그는 개인적인 패배로 고통스러워할 일이 없다.” 진중권도 황교안도, 사회변화를 위해 써야 할 지식인과 정치인의 에너지를, 모조리 개인적 승리를 위해 소모하고 있다. 알린스키는 말한다. “숭고한 정신은 삶을 위대하게 만들 뿐, 삶 속에서 위대함을 추구하지는 않는다”고. 사람의 위대함은 말이 아니라 삶 속에서 발현될 뿐이다.

정치의 계절이다. 무능하고 경멸스러운 수준의 정치를 보여준 20대 국회의 끝이 보인다. 여전히 언론은 각종 정치집단의 합종연횡에만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마땅히 그래야만 할 국가와 정치의 모습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의 정치는 그저 항의하고, 분노하고, 이기적으로 꿈을 꿀 뿐이다. 이제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 정치를 돌려주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항쟁하고, 행동하고, 대의와 타인을 위해 꿈의 세계를 건설하는 급진주의자의 정치다. 급진주의자여,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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