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본영
국제뉴스팀장

당혹스럽게도 ‘예루살렘 왕’이 지금도 있다. 현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의 실효성 없는 칭호들 중 하나다. 1100년에 십자군 지휘관 보두앵이 왕관을 쓴 뒤로 많은 왕공이 탐낸 이 칭호는 왕조와 혈통의 변천 및 다툼을 거쳐 스페인 왕한테 갔다. 유대인들은 고대 이래로 세계를 떠돌면서도 유월절에 “내년엔 예루살렘에서”라는 인사를 나눴다. 무슬림들은 그들대로 자신들의 성도를 피눈물로 지켜왔다. 모순투성이 도시를 놓고 팔레스타인 역사학자 나즈미 알주베는 차라리 “예루살렘에서는 사실의 역사에 관해 묻지 말라”고 했다.

미국 대통령이 복잡한 맥락을 무시하고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공인한 배경에는 유대인의 돈과 기독교 복음주의자들 표가 있다. 유권자 중 복음주의자가 26%다. 대선에서 백인 복음주의자들의 81%가 도널드 트럼프에게 표를 줬다. 트럼프는 복음주의자와 유대인들한테 둘러싸였다. 사위가 유대인이고, 마이크 펜스 부통령은 복음주의자다. 백악관 대변인 세라 허커비 샌더스는 이번 선언을 조직적으로 요구해온 마이크 허커비의 딸이다. 보수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백악관을 무시로 출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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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선언’은 복음주의와 유대교를 잇는 다리를 완성한 문명사적 사건일 수 있다. 극단적 백인 민족주의인 나치즘이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을 시도했는데, 역시 백인 민족주의와 교집합 관계인 보수 복음주의가 이스라엘 국가의 ‘완성’을 추구하니 이 무슨 역사의 변덕인가.

보수 복음주의의 종교관과 세계관은 아슬아슬하다. ‘트럼프 선언’이 나오기 100년 전 “유대인들의 민족적 고향” 건설을 지지한 밸푸어선언의 기반을 닦은 것도 영국 복음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성서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며 종말론의 샘인 요한계시록에 집착한다. 예수 재림, 아마겟돈, 천년왕국, 최후의 심판이 현실의 이스라엘 땅을 중심으로 펼쳐진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계시(사실은 성서에 상상력을 덧댄 것이다) 중 예수 재림의 전 단계로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국가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2010년 퓨리서치센터 조사에서 백인 복음주의자들의 58%(미국인 전체는 41%)가 40년 안에 예수가 재림할 것이라고 했다. 포연이 자욱한 중동의 현실은 그들의 영감을 강화시켜줄 법도 하다. 아마겟돈의 무대 므깃도 언덕도 이스라엘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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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탈출한 정교일치 체제의 위험성을 알기에 정교분리를 건국이념에 넣었다. 지금 불신의 대륙으로 변모하는 유럽 대신 미국이 기독교 근본주의의 전통을 잇는다. ‘종교가 삶에서 아주 중요한지’를 묻는 퓨리서치의 설문에서 프랑스인들의 14%(2014년), 미국인들의 53%(2015년)가 그렇다고 했다. 트럼프는 성직자의 특정 정치인 지지를 조건 없이 허용한 ‘종교의 자유’ 행정명령을 했다. 미국의 신성 국가화는 외교에도 영향을 발휘한다. 무슬림 국가 사람들의 입국 금지도 그 하나다.

이제 트럼프가 ‘성묘의 수호자’(앞에 언급한 보두앵의 형 고드프루아는 예루살렘 왕으로 추대됐으나 그건 예수의 자리라며 이 칭호를 썼다)다. 트럼프는 혹시 기독교를 공인한 공로로 동방정교회가 12사도와 동격으로 받든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를 떠올리며 영적인 욕심까지 품었을까? 예루살렘 등 이스라엘 도시들이 역·거리·공원에 ‘트럼프’라는 이름을 붙인단다. 천국행 사다리를 먼저 타려고 이곳에 뼈를 묻은 전사들과 순례자들을 떠올리면 그런 욕심도 무리는 아니다. 트럼프가 말 한마디로 물적, 영적 이득을 챙기는 사이에 팔레스타인인들은 좌절하고 죽어간다.

eb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