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열전’ 솔거 편에 “그림을 능히 잘 그려 일찍이 황룡사 벽에 노송을 그렸더니, 까마귀와 솔개와 제비와 참새가 거기에 날아 들어가려 하다가 벽에 이르러서는 비틀거리다 쓰러졌다”고 나온다. 비슷한 얘기는 오늘에도 있다. 여러 해 전 경남 양산에서 잘 그린 벽화에 새들이 부딪혀 죽는 일이 생기는가 하면, 이태 전에는 육군사관학교 행사에 기증된 무궁화 그림에 호랑나비가 날아들어 화제를 불렀다. 신사임당의 <초충도>와 남계우의 <화접도> 또한 조선시대 사실화의 백미로 꼽힌다.

사실화와 달리 세밀화는 역설적이게도 사실적이지 않아 실체에 가깝다. 세밀화는 예술과 과학의 중간지대다. 특히 식물 세밀화는 살아 있는 표본이라 불리며 식물학의 중요한 자료로 자리잡았다. 잎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을 하나의 그림에 담아낸다. 짧게는 며칠이 걸리기도 하지만 꽃과 열매 맺는 시기를 기다려야 해 길면 1~2년이 걸린다고 한다.

세밀화는 그리스 의사인 페다니우스 디오스코리데스가 1세기께 당시 치료에 쓰던 식물들을 모아 출판한 <의약물질>이라는 책에 처음 등장했다. 본격적인 발전은 17세기 현미경이 발달하면서부터다. 18세기 들어 과학의 부흥과 더불어 그려진 작품들은 오늘까지 전해오고 있다. 영국 왕립 식물원 큐가든에는 20만점의 세밀화가 소장돼 있다.

광고

우리나라 식물이 세밀화로 그려진 건 1898년 러시아의 이반 팔리빈이 발간한 <조선식물개요>에서다. 광복 뒤 국내 학자들이 한반도 식물 조사와 연구 과정에 세밀화를 곁들였지만 1997년 <세밀화로 그린 보리 어린이 식물도감>이 발간되면서 일반인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국립수목원은 2004년부터 식물 세밀화 제작과 수집을 해오고 있다. 국립중앙과학관은 29일부터 크리스마스 때까지 ‘아트 인 사이언스’ 특별전을 여는데, 세밀화 공모전에서 입상한 작품 37점을 전시한다.

이근영 선임기자 ky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