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호
국제에디터

지난 21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검찰 출석 장면을 보면서 22년 전 그때가 말 그대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 ‘아재 인증’을 스스로 했다. 감옥에서 16일간 단식투쟁을 벌이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병원으로 옮겨진다고 해 휑한 안양교도소 앞에서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며 겨울바람에 온종일 덜덜 떨며 서성대던 밤, 아침 댓바람부터 연희동 자택에서 서초동 검찰청까지 노태우 전 대통령 자동차 뒤꽁무니를 쫓아 강변도로에서 카레이스를 벌였던 일 등.

박 전 대통령 출석 장면 중 그때와 다른 것 하나가 삼성동 집 앞에 운집한 ‘태극기 부대원’들이다. 박 전 대통령도 반가운 마음에 “많이들 오셨네”라는 혼잣말이 절로 나온 듯하다. 골목 나설 땐 입양 가는 아이, 자동차 안에서 엄마 부르듯 차창에 손바닥을 쫙 펴서 딱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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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울 것이다, 내가 뭘 하든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는 이들이. 박 전 대통령에게 ‘태극기 부대원’은 ‘아편’이다. 양치질도 않는 아이가 사탕을 제어 못하면 이가 다 썩듯, 박 전 대통령을 이리 만든 것도 이들이다. 박 전 대통령의 ‘박 전 (한나라당) 대표’ 시절, 친박계는 사석에서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살인만 않는다면 언제든 지지하는 이들이 30%는 된다”고. ‘콘크리트 지지’란 말이 그때부터 나왔다.

그러니 최순실과 국정농단 해도 괜찮을 줄 알았고, 국회에서 탄핵안 결의 안 될 줄 알았고,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안 기각될 줄 알았다. 헌재 결정 당일까지 삼성동 집을 전혀 손대지 않은 게 ‘본인은 기각될 줄 알았고, 그래서 아무도 얘기 못했다’는 게 정설로 굳어진다. 이젠 감옥 안 갈 줄로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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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럽지 않다. 2007년 6월 한나라당 경선 한창일 때, 매달 실시했던 <한겨레> 여론조사에서 이명박 40.1%, 박근혜 25.4%로 나온 적 있다. 전달 22.5%포인트에서 14.7%포인트로 크게 좁혀졌다. 지금 자유한국당 중진인 친박 의원이 한나라당 반장이던 내게 이것저것 묻더니, “됐네, 됐어. 권 반장, 우리가 이겼어. 내가 예상했던 대로야”라고 말했다. 몇표 차로 이긴다며 숫자까지 불러줬다. 당시 친박계 중 경선 전날까지 이길 걸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똑같은 사람 모여, 똑같은 말 나누고, 똑같은 생각 공유하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탄핵되던 날, 지하철에서 한 70대 노인이 전화기를 붙들고 울분에 차 “박지원이가 헌법재판관들에게 20억원을 줬대요, 그래서 그렇게 나온 거야. 죽일 놈들. 이제 남은 건 (우리들의) 순국밖에 없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저편에서 ‘어디서 들었냐’고 되묻는 듯했다. “카카오톡”이라고 했다. 똑같은 생각과 주장을 공유하고, ‘가짜뉴스’도 나눈다. 어른과 아이, 그리고 지식인의 차이점이 자기객관화인데, 기술과 정보의 발달에 반비례해 우린 각자의 동굴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듯하다.

도널드 트럼프에게서도 ‘박근혜’를 본다. 경험 없는 아웃사이더들이 수석전략가, 고문 등 백악관 요직을 꿰차고, 측근 위주로 뽑다 보니 프로골퍼가 백악관 직원이 되기도 하고, 내각에는 ‘트럼프 사람들’이 자문위원으로 들어가 충성도를 감시하고, 딸은 직책도 없이 국정 전반에 관여한다. 그나마 ‘이방카’는 공개돼 있긴 하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트럼프는 ‘제2의 박근혜’가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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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걱정할 만큼 오지랖 펼 때가 아닌 것 같긴 하다. ‘우리가 남이가’인 이 땅의 보수는 ‘우리 편’에게 너그럽고, ‘나쁜 놈’에게 가혹하다. 극단이 시대착오적 ‘박근혜’다. 이 땅의 진보는 ‘약자’에게 너그럽다. 가끔 본인을 ‘약자’로 놓긴 한다. 보수든 진보든 ‘박근혜’ 안 되려면 자기성찰과 객관, 비판에 열려 있어야 한다. 우리끼리만 ‘많이들 오시지’ 말아야 한다.

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