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현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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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부쩍 끔찍한 얘기들을 많이 듣는다. 며칠 전에는 이름만 아는 한 노장이 대량발송 문자를 보내왔다. “촛불집회를 5·18 광주폭동처럼 만들기 위해 북한군 살인 특수부대 요원들이 서울에 잔뜩 와 있다네요...”라는 내용이다. “그들에게 입힐 한국 경찰복과 헌병대 유니폼은 문죄인과 박지원이 공급”하고 “남녀 대학생 시체 몇 개를 추럭에 싣고 다니면서 한국 경찰이 쏘았다고 선동하는 씨나리오까지 완벽하게 전략이 짜여져 있다”며 전파해 달라고 부탁한다.

혀를 차는 이가 많겠지만 사실이라고 믿는 이도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탄핵 반대 태극기 집회에 나갔던 작가 최현숙씨는 주변 노인들로부터 “정치인이고 언론사 사주들이고 다 김대중 때 북한 기쁨조랑 애를 낳고 와서 김정은 말을 따르고 그러는 거예요”란 ‘교육’을 받았다. 신문·방송에서 홍수같이 쏟아지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보도를 아니라고 외면하는 근거가 이로써 갖춰진다.

‘괴담’은 집단적 방어기제일 수도 있다. “내 자식은 누명을 쓴 것이야”라거나 “그이는 죽지 않았어”라고 현실을 부정하는 것처럼, 태극기 집회에 나온 많은 이들은 검찰·특검 수사로 드러난 사실까지 부인하면서 “불쌍한 대통령이 최순실에게 속았다더라”고 말한다. 박근혜 대통령도 “최씨를 평범한 가정주부로 생각했다”고 금방 드러날 거짓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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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기제의 병리적 특징은 받아들이기 아픈 사실을 ‘부정’하고 ‘왜곡’하는 것이다. 생각과 다른 현실에 애써 이유를 붙여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군대여 일어나라” 따위 역사의 퇴행까지 부르짖는 것도 방어기제의 한 모습이겠다. 집단을 이루면 주거니 받거니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방어막이 더 굳어진다. 급기야 “좌파언론은 남파 인민군들” 따위 망상적 투사 혹은 편집증적 증상까지 보인다.

이런 괴담이 요즘 무성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탄핵심판과 특검 수사가 정점으로 치달으면서 태극기 집회의 ‘애국심’을 격려하는 이들이 늘었다. 반전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겠다. 탄핵 찬성에서 말을 바꾼 정치인도 있고, 숨죽이고 있다가 기류가 바뀌었다는 듯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의원들도 있다. 그런 이들이 보수의 재결집을 주장한다. 뻔한 사실을 부정하고, 확인되지 않은 억지 주장을 재생산한다. 자신의 말을 믿기나 하는지 의심스럽다는 점에선, 노인들에게 사이비 의료기기나 건강식품을 파는 ‘홍보관 상술’이 떠오른다. 정치적 이득을 챙기겠다고 대책 없는 강경에 기대는 것이 책임 있는 정치인의 모습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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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목소리가 더 커진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모든 언론이 한목소리로 지적하고 검찰과 특검이 수사한 결과까지 조작과 음모라고 무조건 몰아붙이는 것이 합리일 순 없다. ‘찌라시’나 일인 미디어, 가짜 뉴스 따위에서 자기 합리화의 근거를 찾는다면 이미 정상이 아니다. 재벌에게서 돈을 뜯어낸 것도, 헌법을 유린한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도, 문화예술인을 억압한 블랙리스트도 아무 문제가 없다며 ‘대통령의 청렴’을 찬양하는 것이 보수일 수도 없다. 아스팔트로 추락해 날것 그대로의 몰염치만 남은 보수는 너무 구리지 않은가.

‘새는 좌우의 양 날개로 난다’고 하지만 그쯤 되면 날개의 한쪽이긴 어렵다. 지금 필요한 것은 반성하고 토론할 줄 아는 품격 있는 보수다. 보수의 깃발을 더럽힐 뿐인 가짜와 손잡거나 방치하다가는 덩달아 추락하게 된다. 그런 가짜를 대세로 착각하는 이가 자칫 생긴다면 조기 탄핵을 전제로 돌아가는 모든 일이 다 어그러질 수도 있다.

yeop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