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은
강원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지난 연말 위증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위정자와 고위공직자, 의사, 교수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방송됐다. 그 누구보다 모범을 보여야 할 이들이 미꾸라지처럼 법을 악용하고 도덕을 내팽개친 채 공공연히 거짓말을 하는 것을 지켜보자니, 가히 ‘거짓말 권하는 사회’로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새해 첫날엔 탄핵심판을 앞두고 있는 직무정지 상태의 대통령이 기자간담회를 열어 거짓으로 일관된 억지 변명을 당당하게 늘어놓는 모습을 보게 됐다. 평소와 달리 기자들과의 거리는 매우 가까웠고, 몸짓은 적극적이다 못해 연극적이었다. 무슨 자격과 양심으로 그런 자리를 마련했는지 정치 감각이 무딘 일반인으로서는 감히 헤아리기 어렵지만, 법률대리인조차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발뺌을 하는 걸 보면 부적절한 자리였던 건 분명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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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도 노트북도 허용되지 않은 예외적 상황에서, 대통령의 바람대로 ‘수첩’만을 달랑 들고 들어간 기자들은 장관이나 수석들이 그랬던 것처럼 묵묵히 대통령의 일방적 거짓 메시지를 ‘받아 적었다’. 심지어 그마저 포기한 채 두 손 공손히 모은 기자들도 있었다.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한 연극에 기자들은 병풍처럼 서 있다가 나와서는 청와대가 제공한 화면과 사진으로 앞을 다퉈 보도했다. 이런 보도야말로 “시청자의 윤리적 감정이나 정서를 해쳤다”는 이유로 제재해야 하는 건 아닌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묻고 싶다.

한국 언론의 받아쓰기는 출입처 제도와 연결돼 수도 없이 지적됐지만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다. 몇몇 정치인이나 정부기관, 대기업에 뉴스가 집중되고 원하는 정보만을 던지는 취재원의 언론 플레이에 놀아나기 쉽다는 점에서 받아쓰기는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 이번 간담회 역시 철저하게 계산된 ‘미디어 이벤트’였지만, 남이 쓰는 것을 안 쓰면 큰일나는 것으로 아는 한국 언론의 습성상 거부하거나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검증과 비판은 접어둔 채 따옴표 안에 숨어서 거짓을 사실로 둔갑시킨 무책임한 보도 내용과 방식은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언론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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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중견기자가 이런 말을 했다. 청와대 출입기자에게 관련 소식을 물었더니 자기도 모른다면서 자기는 청와대 ‘출입기자’지 청와대 ‘취재기자’가 아니라고 했단다. 어디 청와대뿐이랴. 이 우스개 같은 얘기가 결코 우스개가 아니라는 데에 한국 언론의 치부와 병폐가 있다. 이렇게 ‘정곡을 찌르는’ 기자들의 자기비하는 왠지 찡하지만, 그런 문제를 스스로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깨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안이함은 질책받아 마땅하다.

새해를 맞아 풀어야 할 언론 분야 문제들이 산적해 있지만, 이런 보도행태를 바꾸려면 무엇보다 정치권력의 직간접적 통제 아래 놓여 있는 공영언론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일이 중요하다. 최근 <한국방송>(KBS)의 15년차 이상 기자 104명이 사장 사퇴를 요구했고, <연합뉴스>도 97명의 ‘젊은’ 기자들이 “출근길이 두렵고 퇴근길이 부끄럽다”며 불공정 인사와 보도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냈다. <문화방송>(MBC) 사옥 앞에선 수년째 출근하지 못하는 해직기자들이 돌아가며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다. <와이티엔>(YTN) 해직기자들은 다큐멘터리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복직을 소망한다. 결자해지, 사필귀정이 실현되는 사회라야 참이 거짓을 이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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